킬링필드에서 호캉스
2025.1.14일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한달살이를 마치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왔다. 비엔티안이나 프놈펜이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많이 다르다. 비엔티안은 한국의 소도시인 남원이나 구례 정도라면 프놈펜은 광주나 대전 같은 도청도재지 급이다. 곳곳에 커다란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다. 88 올림픽 전후 서울 곳곳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던 모습과 유사하다. 시내 곳곳에 타워크레인이 보이며 숙소인 33층 건물보다 높게 올라가고 있는 건물 몇십 개가 눈에 들어온다. 중국과 일본 자본으로 건설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고층건물이 다 필요한가 의문이 든다.
고층건물 바로 주변에는 재개발되지 않은 빈민촌이 수두룩하다. 재래시장과 도로 주변 노점상들 그리고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풍경은 우리의 70년대와 비슷하다.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모두 비슷한 풍경이다. 킬링필드라는 어두운 기억만 가지고 있는 캄보디아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화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캄보디아는 앙코르 와트가 있는 역사 깊은 나라이지만 수도인 프놈펜의 역사는 비교적 최근이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1867년에 수도가 되었다. 당시 캄보디아를 식민통치하던 프랑스의 도움으로 왕궁과 주요 시설을 건설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 전쟁 시 북베트남의 보급로였던 호찌민 루트가 있었던 관계로 미국의 혹독한 공습으로 폐허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에는 악명 높은 킬링필드로 3백만 명이 학살당하고 굶주려 죽는 등 세계 최빈국이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안정을 찾으면서 발전 중이다. 짧은 도시의 역사와 전쟁 그리고 킬링필드로 인한 파괴로 인해 프놈펜에서 볼만한 역사유적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왕궁, 박물관, 킬링필드 현장 그리고 동남아 어디서나 흔한 불교사찰과 재래시장이 전부이다.
프놈펜 도착 첫 주에 툭툭을 타고 도시 전반을 둘러보고 왕궁을 비롯한 몇 곳을 관광하고 야간 유람선을 타 보고 나니 끝이다. 이것은 프놈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도시가 마찬가지이다. 세계적인 도시 서울도 4~5일 둘러보고 나면 더 이상 갈만한 곳이 없다. 서울도 그럴진대 서울보다 작은 대부분의 도시들은 3~4일이면 더 이상 갈만한 곳이 없다. 이후에는 잔여기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루틴을 만들어 지내야 한다.
루틴을 만들 때는 숙소가 중요하다. 사는 곳의 위치는 한달살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요소이다. 학생이 있는 집은 좋은 학교와 학원이 있는 곳이 좋을 것이고 은퇴한 사람은 은퇴한 사람이 살아가기 좋은 곳을 찾아야 한다. 경제력에 따라 선택의 폭이 다를 수 있지만 운동시설, 문화시설, 병원, 식당, 마트 등이 가깝고 교통이 좋은 곳이 삶의 질을 높여줄 것이다. 특별한 취미나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하기에 유리한 장소가 좋을 것이다.
나는 해외살이 중 글쓰기와 운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숙소를 구할 때부터 글쓰기와 운동에 좋은 장소를 찾는다. 걷기 좋은 큰 공원이나 강변으로부터 가까운 곳 그리고 주변에 글 쓸 수 있는 카페나 도서관이 있는 곳 그리고 마트와 식당이 많은 곳을 찾는다. 이번 겨울을 보낼 라오스, 캄보디아, 발리는 물가가 저렴한 곳이므로 꽤 고급스러운 숙소를 선택했다.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는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는 레지던스 호텔을 잡았고 발리는 깔끔한 민박집을 선택했다. 고급스러운 숙소이지만 월 100만 원 수준이다. 비교적 저렴하다는 동유럽 국가에 비해서도 반값이하이다. 동남아 100만 원 월세 집은 프라하, 비엔나, 부다페스트, 이스탄불 등 동유럽에서는 월 300만 원 수준이다.
프놈펜의 숙소는 일본자본으로 건설된 33층 짜리 현대식 호텔이다. 호텔 로비에는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맨 위층에는 루프탑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으며 일본자본으로 건설해서인지 목욕탕과 사우나가 있다. 프놈펜은 1월에도 30도 이상의 더운 날이어서 수영하기에 좋았다. 나는 프놈펜에서의 한달살이 콘셉트를 호캉스로 정했다. 글쓰기는 호텔 로비에서 하고 운동은 호텔의 수영장, 헬스클럽에서 하고 사우나, 목욕탕을 이용하며 느긋하게 지내기로 했다. 오전과 저녁에는 로비나 방에서 노트북으로 글 쓰거나 유튜브를 보고 오후에는 호텔 수영장, 헬스클럽, 사우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운동 겸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요즘은 하루 두 끼만 먹는다 조식은 전날 마트나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먹거리로 간단히 해결하고, 식당에서 약간 빠른 저녁을 먹는다. 첫 주에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현지식을 먹었는데 별로 입맛에 안 맞는다. 마침 숙소 근처에 한국식당 백종원의 “본가”가 있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는 대신 저녁은 한국식당에서 든든히 해결했다. 본가의 음식은 한국에서의 맛과 흡사하며 가격도 한국에서와 비슷하다.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십 분의 일인 나라에서 한국과 가격이 같다는 것은 현지인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다. 이런 비싼 가격에도 현지인들이 많다는 것이 신기하다. 캄보디아 부유층이 외식으로 한국식당을 찾는듯하다. 한국의 문화에 이어 음식까지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이 자랑스럽다.
저녁시간에는 노트북 작업을 했다. 지금까지의 한달살이 도시에서는 노트북으로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봤는데 프놈펜에서는 영어공부를 겸한 영어 채팅이 추가되었다. 라오스에서 가까워진 호텔 여직원이 매일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내온다(여직원과 가까워진 이야기는 이전 글에 나온다). 라오스어와 한국어는 오역이 많으므로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영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저절로 영어공부가 된다. 몇 년간 영어 쓸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영어단어와 스펠링이 가물가물하다. 영어로 채팅을 하다 보니 단어도 다시 찾아보게 되고 영어 표현도 찾아보게 되어 영어 실력이 조금씩 회복된다. 4월부터 유럽 한달살이 가게 되어 영어공부가 필요했었는데 라오스 여성과 매일 한 시간 정도씩 영어채팅을 하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 매일 한 시간씩 채팅이 가능하다. 라오스에서 만난 37세의 처자가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니 나 역시 기분이 좋아져서 매일 채팅이 기다려질 정도가 되었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그녀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려고 나에게 가식적으로 애정공세를 퍼붓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채팅이 지속될수록 그녀가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는 내 나이를 모른다. 나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너보다 한참 많아 “라고만 얘기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와 유럽인들과 대화해 보면 대부분이 내 나이를 50대 초중반으로 본다. 우수한 한국인의 유전자 덕분에 외국인에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10살은 적어 보인다. 그녀도 내 나이를 50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이는 상관없어요”라고 얘기한 후 더 이상 나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더니 매일 나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제는 그녀가 자기 아버지 보다도 나이 많은 남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놀랄까 봐 내 나이를 얘기할 수도 없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그녀가 퇴근 후 식사를 마친 7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영어로 문자가 온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영어 채팅을 한다. 채팅이 매일 진행되다 보니 대화 소재가 자꾸 넓어진다.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학창생활, 결혼생활 그리고 이혼 후 애 키우며 고생한 그녀의 전 일생을 이야기한다. 자녀교육이나 본인의 미래계획을 얘기할 때 보면 상당히 지혜로운 여성임이 느껴진다. 무식한 소리나 하고 있으면 대화가 식상할 것이지만 상대가 지적인 게 느껴지니 더욱 대화가 맛깔나게 진행된다. 나 역시 젊은 처자의 애정공세에 설레기도 하고 영어공부 한다는 기분으로 매일 그녀와 채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9번의 해외살이 중 가장 특이한 한 달을 보내고 있다.
나는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지공거사이다. 사랑을 줘보기도 하고 받아보기도 했다. 그녀는 23세에 결혼하여 애 둘 낳고, 27세 이혼한 후 10년간 힘든 일 하면서 애만 키우고 있다. 37세가 되어 우연히 만난 자상한 남자에게 사랑에 빠진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얼마 안 가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도 안다. 어렵게 살던 처자가 우연히 느낀 사랑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서서히 사라질 사랑의 감정을 재촉하여 깨뜨릴 필요도 없다. 영어공부도 할 겸 젊은 처자의 애정공세에 즐거운 마음으로 응답하고 있다. 이제는 나도 덩달이 7시 30분이 기다려진다. 아마 한두 달은 지속될 것 같다. 이후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그리고 한 달에 한두 번 그러다가 서서히 잊혀 질 것이다. 남녀관계는 “out of sight, out of mind“이다.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두세 시간을 보낸다. 수영하다가 눕는 의자에서 휴식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33층의 루프탑 인피니트풀이라서 전망이 아주 좋다. 매일 수영장에 살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과는 눈인사를 하게 된다. 눈인사를 몇 번 했던 서양 할머니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그 동안 심심했는데 너 잘 걸렸다” 하는 듯이 아주 반갑게 나에게 수다를 떤다. 이스라엘 할머니다. 이런저런 얘기 중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복무를 하며 자기는 4년간 육군 탱크부대에서 군복부를 했고 탱크를 몰고 전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할머니다. 남편이 프놈펜 대학 교환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지금 6개월째 이 호텔에 묵고 있단다. 남편이 출근하면 할 일이 없어서 요가학원 다니거나 이곳 수영장에서 수영한단다. 할머니가 신나게 떠들고 있는데 남편이 왔다. 남편은 아주 근엄하게 생긴 말수 적은 교수님이다. 함께 저녁식사 하자고 해서 부부와 함께했다. 내 나이를 듣더니 부부가 깜짝 놀란다. 이 부부도 내 나이를 50중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와 같은 67이고 할머니는 65란다. 나보다 어린 할머니다.
서양여자들은 피부가 왜 그렇게 빨리 늙는지 이상하다. 수영복 밖으로 보이는 상반신 피부가 뱀가죽처럼 거칠어서 70 이상인줄 알았는데 나보다 어리단다. 부부와 함께 식사 이후 어린 할머니는 나의 수영 친구가 되었다. 참전용사답게 수영이 수준급이다. 함께 수영하고 누가 빠른지 시합도 하면서 재밌게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수영복으로 편하게 돌아다니면서도 내 앞에서는 툭 뛰어나온 뱃살을 가리려고 수건으로 배를 두르고 있는 것도 귀엽다. 할머니는 내가 퇴직 후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을 부러워하고 나는 할머니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전용사라는 것에 경의를 표하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할머니는 무척 수다스러운데 남편이 무뚝뚝하다 보니 나에게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푸는 듯하다. 이스라엘에 꼭 오라고 해서 내년에 이스라엘에서 한달살이 생각 중이다.
헬스클럽에서도 매일 한두 시간 운동한다. 과거 헬스클럽에서 운동한 적이 있지만 장기간 매일 운동한 적은 없었다. 호텔 헬스클럽에는 다양한 운동기구가 있다. 운동기구 사용법을 잘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눈여겨봤다가 나도 따라서 했다. 야외에는 걸을만한 공원이 없으니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 걷고 기구운동을 한 시간 정도 한다. 2주일 정도 지나니 몸이 확실히 달라진다. 물렁물렁하던 팔뚝이 단단해지고 처진 가슴이 위로 올라간다. 팔뚝과 가슴 만질 때마다 뿌듯하다. 허벅지도 단단해진 것이 느껴진다. 공기 좋고 시원한 야외 두고 뭐 하러 공기 나쁘고 답답한 실내에서 운동 하나 생각했었는데 헬스가 이런 즐거움이 있는 줄 몰랐다. 처음 시작 했을 때 보다 무게를 늘리고 횟수도 늘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영복 입고 돌아다녀야 해서 더 열심히 운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찾을 수 없으면 만들면 된다. 작년 말 한달살이 한 타이베이에서는 여러 공원과 산을 찾아다니며 걷는 즐거움이 있었고 지난달 라오스에서는 마사지받는 즐거움이 좋았다. 프놈펜에서는 호텔에서의 호캉스와 젊은 처자와의 영어채팅 그리고 할머니와의 수다와 수영이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