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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15. 2021

엄습

[피아노]OST중<ThePromise>byMichaelNyman

https://www.youtube.com/watch?v=HRrQckINCJ0








  안달이 나는 순간은 많았습니다.

 이러다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설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으니까요.

 이번엔 느낌이 달랐습니다. 

 느낌이 달랐는데도 코웃음을 치고 말았죠.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으니까.


 방심은 금물이라는 걸 수없이 되뇌었건만, 타고난 나태함은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말았습니다. 

 냉철함을 가장한 냉랭함은 또다시 고개를 들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말합니다.


 "아무 데나 가자. 아무거나 괜찮아."


 여자는 말합니다.


 "그럼 그냥 가까운데 가자."


 괜한 어색함을 가라앉히려는 듯 남자는 말하지만, 어서 냉각기로 들어가자는 의지를 온몸 가득 내뿜고 있을 뿐입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네. 간단히 마시고 들어가 쉬어. 그러는 게 낫겠다."


 이런 게 한두 번인가요, 의도를 알아챈 여자가 답합니다.


 "그래, 정말 몸이 안 좋네. 한 시간만 있다가 가자."


 왜 이럴 때 유난히 쿵짝이 잘 맞는 건지. 이런 위기엔 엇박자가 나야 지옥으로의 추락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몰랐습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친구에게 눈물을 쏟으며 하소연을 하는 순간에도 희망은 말풍선처럼 둥실 떠 있었습니다.


 "다시 볼 수 있겠지?"


 "응, 그럴 거야." 


 그날 싸늘했던 서로의 대화는.

 냉각기의 시작이 아닌

 빙하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빙하기는 지구의 탄생 이후 가장 긴 빙하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군요, 어쩌면 영원한.

 여태껏 지구를 덮친 빙하기는 아무리 길었어도

 결국 끝나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니. 

 풀 한 포기의 생장조차 허락지 않는 절대 혹한이 영원히 드리워질 테니.

 '우리'라는 말은 사전에서 지워져 버려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심장이 굳고 추억이 굳고 이름이 굳어져 버렸으니

 동사(凍死)만이 결말입니다.

 죽지 않고 추위만 느껴야 한다면.

 그게 더 지옥입니다.

 차라리

 얼어 죽는 게 낫습니다.


 


 늦겨울 밤, 남자가 물었습니다.


 "어릴 적 꿈은 뭐였어?"


 시선을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여자는 말했습니다.


 "피아니스트."


 "멋지네. 왜 꿈을 접었어 그런데?"


 부끄러움이 얼음 망치가 되어 가슴을 때립니다.  

 어슴푸레 떠오르는 신기루 같은 파편뿐. 

 영원히 하나라고 믿었던 

 소중한 사람이 꿈을 포기한 이유조차.

 뚜렷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남김없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분명히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걸 다 바쳐서.

 그 보석 같은 꿈을 잃어버린 이유조차.

 바보 천치 같은 남자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빙하기가 다가옵니다.

 시야에 들어오는 먼발치부터. 

 악마의 주술에라도 걸린 듯, 풍경과 사물들이 하나씩 하나씩 꽁꽁 얼어붙어 버립니다.

 남자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얼려버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촉박합니다.


 맹렬히 다가오는 빙하가 다리를 타고 올라 얼굴을 덮기 전에는

 전해야 합니다. 여자에게.

 

 오직 미안할 뿐이라고.

 참회가 소용없을 걸 알고 있다고. 


 두리번거리며 찾습니다. 여자가 보이질 않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촉박합니다.


 여자가 없어도 외칩니다. 그 방법 밖엔 없으니까. 턱밑까지 얼어버렸으니까.


 "사랑해."


 죄스러움과 후회까지 담긴 한 마디를 고르려니

 단말마와 동시에 나오는 말은 

 사랑해. 뿐이었습니다.


 이제 끝입니다.


 온몸이 얼어버렸습니다.


 영원히 녹지 않을 빙하기는


 이제 시작됐을 뿐입니다.


 얼음기둥이 된 우리는.


 이어서 거대한 얼음덩이가 될


 지옥과도 같은 냉기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세상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제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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