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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Oct 11. 2021

게으른 넋두리일 뿐이지

[이영훈 소품집] 중 <그대와의 대화> by 이영훈

https://www.youtube.com/watch?v=--ij758jRac







  좀 이상해.

 오랜만에 찾은 바다는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몸을 휘청이게 하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차분할까.

 익숙하다는 듯.

 오히려 시원하다는 듯.

 파도가 음악에 맞춰 침착하게 일렁이는 느낌이야.

 관망하는 옆모습 찍으면 꽤 분위기 있어 보일 텐데.

 찍어주지 않겠어?

 나 몰래 많이 찍었잖아. 못생긴 내 모습을.

 아.

 너 없구나 이제.


 바람이 부는 날엔 그렇듯, 바다를 바라보니 수면 위 하얀 포말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졌다가...

 마치 두더지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우습다.

 비바람으로 궂은날, 바다를 보며 수면을 망치로 내려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몸이 아파졌어. 그래서 불편한 요즘이야.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런 노화과정인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누구에게 하소연하기도 불편할 따름이야.

 네가 있었으면 이럴 때 내 엄살 지겹게 들었겠지?

 딱딱한 의자에 앉기가 불편해 쿠션을 등에 덧대고 로봇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글을 쓰고 있어.

 알 거야. 바른 자세 유지하겠다고 허리를 곧게 편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원초적인 몸의 게으름.

 게으름에 묻혀버리면 결국 고통의 구렁텅이.

 내 자세가 무너졌구나 싶을 때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보지만 

 5분만 지나면 액체괴물이 되어 세상 가장 편해 보이는 커브를 그리며 꾸부정해지는 걸 어찌하겠어.

 당장 꿀같이 편하게 느껴지는 자세가 쌓이면

 알게 모르게 한계에 달한 몸이 결국은 항복을 하게 마련이지. 그래서 병원에들 가잖아.   


 오늘 다시 글을 쓰려 그 카페에 와 앉아보니 

 이제는 자세가 잠깐만 흐트러져도 바로 몸이 답을 하는 거 알아? 신기해 미칠 지경이야.

 균형이 무너진 몸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곧 상당한 고통이 따를 테니.

 그 고통이 뭔지 아니까. 

 학습효과란 건 이런 것이었어. 효과를 실감하기 위한 대가가 꽤 컸어도 말이야.

 다시는 꾸부정한 자세 없을 거라 다짐해. 자신 있지만 그것도 지금 뿐일까?


 행복에 겨워 그랬겠지?

 널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너에게 어떤 사랑을 받아도 당연하게 여겼던 거야.

 나도 너 사랑하니까.

 네가 준 특별한 사랑의 표현 그저 당연하게 받아먹었던 거야.

 나도 지난번에 아낌없이 표현했으니까

 가고 오는 거지 뭐. 주고받는 거지 뭐.

 나와 비할 수 없는 각오로 모든 걸 다 걸고 사랑했던 널

 한없이 편한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감상했던 거라구.

 

 못된 버릇은 쌓이고 쌓여

 꾸부정한 심장이 되어버렸어.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나인지 순간순간 깨닫고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스스로 꿀밤을 놓으며 자세를 바로 고쳐야 했는데

 지금의 나를 보니

 간절함에서 나온 지극히 달콤한 사랑을 받아 처먹으며 

 상체는 소파 위에.

 하체는 바닥에.

 게으름의 초고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늘어져 있어.


 몸의 버릇은 알아서 고치면 그만이지만

 심장의 버릇은 고쳐도 소용이 없잖아.

 고쳐서 베풀어야 할 대상인 네가 없으니까.


 어쩌면 좋을까.


 나 


 어쩌면 좋을까.


 

  

 그냥 이리저리 떠밀리며 아무 감각도 없이 떠다니는 날들보다는

 어쩌면 이게 나을 수도.

 불편한 몸으로 숨어있던 상처와 우울이 슬며시 올라와 내 전부를 덮어가고 있다는 것.

 그것도 삶에 의미부여 아닌가?

 지금의 날 규정해 주잖아. '별 볼 일 없는 우울한 녀석'으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밍밍한 인간상보다는 나을 것도 같아. 

 그러니 고마울 게 많은 거야. 세상은.


 마주 앉아 내가 한 마디 네가 한 마디.

 나 한번 크하하. 너 한번 꺄르륵.


 그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걸 뼛속 깊숙이 실감하는 바야.

 몇 년을 살았는데. 진즉에 알았어도 좋았을 텐데. 


 운명이라 느낀 너와의 첫 만남부터.

 기억나는 대화들이 한이 없어.

 옮겨 적을 수가 없다.

 책으로 만들자면 백과사전 정도는 우스울 거야.


 내 손을 잡고 퐁당퐁당 헤엄을 치던 날 생각 나?

 나 역시 수영을 그리 잘하는 것도 아닌데.

 박태환 황선우 급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 바라보며

 세상 일등으로 귀엽게 물장구를 치던 너.

 이렇게라도 헤엄 처음이라며.

 아이처럼 웃었잖아 너.

 널 보며 나도 아이가 돼 버렸지.

 물론 그 아이들은 뭍으로 나오자마자 맥주를 찾았지만 말야.

 

 고맙다고 했어 넌

 나에게.

 고작 손 잡아준 것 가지고.

 발장구 친 건 너거든.

 네가 움직인 거거든.


 수없이 많은 우리의 대화는 보통 그렇게 결말이 났어.

 100분의 1도 답하지 못한 나 따위에

 네가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로 말이야. 


 비바람은 더 거세지는데

 내 마음은 더 차분해진다. 

 수많은 포말이 넘실대는 가을의 바다가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잔잔한 호수처럼 느껴져.


 굳은살이 만들어진 거겠지, 못난 심장에.

 

 사람은 어떻게 될까.


  언젠가 쓴 적이 있어.

 죽음.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게 아닌가.

 내가 있어야 두려워하고 말고도 있을 텐데.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자.

 두려운 것은 죽음까지 가는 과정에서 맞는 이별의 고통일 뿐이다.

 그래.

 존재하지 않음이 두렵다면 내가 존재하기 전 시간들도 두려워해야겠지.

 말이 안 되잖아.


 근데 말야.

 이렇게 평생을 아프게 가져가야 할 사랑이 가슴속에 박혀 있는데.

 심장이 썩는다고 정말 모든 게 사라져 버릴까?

 이렇게 내 모든 것인 너에 대한 기억이

 죽음과 함께 공중분해되고 마는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나 그렇다면

 이 세상은. 자연의 섭리는 저주받아야 할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잔인하게.

 모든 걸 다 앗아가도

 그 사랑만은 어떻게든 간직하고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말이야.


 네가 잠시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아무 말하지 않을 것 같아.

 바다 한번 바라보고

 네 눈 한번 바라보고

 무한한 대화가 한 번의 눈 깜빡임에 다 들어가 있는걸.

 꿈에서라도 그럴 수 있었으면.


 뻔하고도 못난 결론.


 그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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