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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Jul 19. 2023

요양병원을 떠나며

(4)

수요일이었다. 연차를 쓴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요양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엄마가 핸드폰을 바꿔달라고 어찌나 끈질기게 요구하는지, 고장이건 아니건 일단 바꿔줄 작정이었다. 


평일 낮 도로는 한산하고 날씨는 화창했다. 시간이 지난 후 2023년 봄을 돌아보면, 유난히 날씨가 화창하고 예뻤다고 기억할 것이다. 절대 못 잊겠지. 절망스러운 내 상황과 대조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날씨였기에.


점심 직전, 요양병원에 도착했다. 차를 대고 들어와 로비 소파에 앉았다. 나름 봄이라고 무릎 위까지 오는 원피스에 구두를 신었더니 의자에 앉기가 조금 불편했다. 어차피 오래 안 있을 거니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보며 간병인이 엄마를 데리고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걸을 때 유난히 왼쪽으로 쏠린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걸음걸이도 다리에 힘이 없어 질질 끌리는 게 아니라, 보폭이 아주 작고 재빨랐다. 혹시 엄마는 그냥 기운이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이상이 있는 건 아닐까?


검색창에 증상을 적어넣었다. 걸을 때 한쪽 쏠림, 밥 먹을 때 한쪽 얼굴 약간 마비, 인지 저하, 카톡 작성 시 와해된 문자... 검색하니 뇌졸중 증상과 매우 흡사했다.


'설마 뇌졸중일까? 에이 아냐, 그랬다면 지금까지 안 쓰러졌을 리가 없지.'


나는 이 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하지만 만약 경미한 뇌졸중이라면? 아직 쓰러지진 않았지만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학생 때, 동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기 아버지는 병원으로 일찍 옮겨 목숨을 건지셨다. 한 시름 놓은 동기가 이렇게 말했다.


"뇌졸중은 시간이 생명이야."


만에 하나 엄마가 뇌졸중(혹은 뇌졸중 전조 증상)이라면 당장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검색만 해본 내가 정확히 판단했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판단해줘야 하는데...


참, 요양병원에는 그가 있지. 서울대 의대 출신,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의대를 사교육 없이 들어갔지만 첫사랑에 실패하고...


"저 혹시 OOO 선생님 근무 중이신가요?"


접수 카운터 직원에게 물었다.


"네 오늘 근무 중이신데요. 뭐 때문에 그러시나요?"


"저 오미실 환자 보호자인데요, 선생님께 꼭 여쭤볼 게 있어서요."


"잠시만요."


직원이 어디로 전화를 걸더니 끊고 말했다.


"105호로 가보세요. 선생님 계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105호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침 엄마가 간병인의 부축을 받고 소파로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나 지금 선생님이랑 얘기해야 해서 조금 이따 올게."


"밥은 먹었어?"


"아니 아직."


"올라가서 같이 먹자. 오늘 수제비 나왔는데 아주 맛있게 생겼어. 너 좋아할 거 같애."


"응 알았어. 일단 엄마 다시 올라가서 점심 먹어. 난 의사 선생님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연락할게."


"나 안 먹고 기다릴 거야."


"어휴 알았어. 올라가서 기다려."


105호로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이 서류를 챙겨 탁자로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 앉으시죠."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엄마의 증상을 말했다. 가만히 듣던 의사가 말했다.


"전형적인 뇌졸중 증상인데요. 뇌졸중은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돼요."


"혹시 여기 신경외과 선생님 계신가요?"


"안타깝게도... 저희 병원에는 신경외과가 없습니다."


"아 네..."


"지금이라도 응급실로 옮기는 건 어때요? 암 수술은 보니까... 전부 G대학병원에서 했네요? 여기로 가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요."


"아 그런데 G대학병원 응급실은 좀..."


한 달 반 전, 엄마가 심한 두통과 발열로 동네 내과에 갔다가, 피검사 후 염증수치가 너무 높으니 당장 응급실로 옮기라는 말을 들었다. 엄마는 혼자 동동 거리다가 오빠가 사설 응급차를 불러줘서 G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엄마가 사는 A시에서 G대학병원까지 2시간이 걸렸다. 응급실 앞에 사설 응급차가 서고, 엄마는 응급진료를 받기 위해 접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G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엄마를 받아주지 않았다. 응급환자가 너무 많고, 엄마의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오후 4시에 도착한 엄마는 밤 9시 넘어까지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했고, 대기하는 동안 응급차도 돌아가지 못했다. (사설 응급차는 환자가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하면 계속 대기하도록 되어 있다)  


결국 엄마는 뜬금없이 H병원 응급실로 가서, 간단한 검사 후 장염 약과 항생제 처방을 받아 귀가했다. 이 날 이후 엄마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응급실은 안 간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이 얘기를 들은 의사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게 우리나라 메이저 대학병원들의 어두운 현실이에요. 환자에 대한 팔로업이 없거든요. 자기 병원 환자잖아요. 증상이 심하지 않아도 일단 받아주고, 검사하고 약을 주고 보내든 해야 하거든요. 바쁘다고 자기네 환자를 나몰라라 해요. 이 주위에 있는 S병원이나 C병원은 지역 주민들이 많이 이용해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 편이거든요. 적어도 자기 병원 환자를 모른 척하지는 않아요."


나는 기로에 섰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1번) 애써 모른 척하고 일주일을 더 기다려본다. 엄마가 영양제를 충분히 맞고 회복될 수도 있으니까.


2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G대학병원 응급실로 일단 간다.


1번이 심적으로 끌리긴 했다. 일단 엄마가 쓰러질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고, 마음 한편으론 얼른 집에 가서 아기와 남편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평온한 날들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나 자신을 속이는 선택을 의미했다. 엄마의 증상은 확실히 불안했다. 더 있다가는 며칠 내로 이 요양병원이 엄마의 마지막 장소가 될 수 있었다.


2번은 내가 자신이 없었다.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2시간을 꼬박 달려 G대학병원으로 가서, 응급실 앞에서 무작정 몇 시간을 기다릴 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만약에 이번에도 거부당하면 엄마는 엄마대로 고생하고 나도 절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2시간이 걸려 이 요양병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럼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거다.


"선생님... 그럼 이 방법은 어떨까요?"


내가 생각한 절충안은 이랬다. 의사가 말한 S병원과 C병원은 모두 요양병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그중 한 병원의 응급실로 간다. 증상을 말하고 뇌 CT를 찍어본다. 아마 G대학병원보다는 응급환자가 적을 테니 적어도 거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확실히 이상이 있다면 G대학병원으로 다시 옮겨야 하는 위험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제가 S병원에 전화를 해보고, 소견서도 써드릴게요."


"진짜요? 정말 감사합니다. S병원에 아는 분이 있으신 거죠?"


"아뇨, 없어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든 응급실에 들어가실 수 있게 연락해 볼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신 90도 인사를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깜짝 놀랐다. 그의 등 뒤에 후광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왜소하고 초라한 요양병원 의사가 아니었다. 듬직하고 믿음직한 진짜 의사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왜 안 와. 나 밥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너 배고파서 어떡하니."


심각한 병에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딸 밥 걱정을 하네.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잘 들어. 엄마 어쩌면 뇌졸중 초기일지도 몰라. 아닐 수도 있긴 한데, 우리 응급실 한 번 가볼래?”


‘절대 싫다’고 말할 줄 알았던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가자.”


예상외로 흔쾌한 대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어떻게 해서라도 요양병원을 나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엄마. 밥 먹고 짐 챙겨서 로비로 내려와. 나는 여기 식당에서 밥 먹을게."


"알았어."


요양병원 1층에는 직원과 보호자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있었다. 유리문에 ‘식권 2천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식판을 들고 어디에 돈을 내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오미실 여사님 따님!"


그때 그 영양사였다.


"안녕하세요! 저... 식권은 어디서 사나요?"


"식권이요? ㅎㅎ 그냥 드세요."


"정말요?"


"네. 오늘 수제비 맛있게 됐으니까 많이 드세요. 두 번 드세요."


영양사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곤 다른 직원들이 있는 자리로 갔다. 엄마의 말동무를 자처하고, 속상해하는 날 위로하고, 밥까지 공짜로 주는 그녀는 백의의 천사였다. 간호사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녀는 백의의 천사였다. 흰옷을 입기도 했고.


나는 식판에 수제비를 듬뿍 담아 자리에 앉았다. 응급실로 옮기기 전에 든든히 먹어야지. 국물을 떠먹으니 살짝 매콤한 게 아주 맛있었다. 이래서 엄마가 나한테 계속 먹으라 그랬구나. 밥이랑 반찬을 리필까지 해서 싹싹 다 먹었다. 밥을 먹으니 조금 더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이제 엄마를 살리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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