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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Feb 26. 2024

탈모인이라 슬프지만 괜찮아(아마도)

안 괜찮아도 별 수 있나요

남편은 탈모인이다. 머리숱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아직 텅 비진 않은 중간 정도의 탈모인. 결혼 전에는 머리에 대해 언급하면 크게 상처받을 줄 알고 한 마디도 안 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그가, 결혼하고부터는 거리낌 없이 본인을 대머리로 칭한다. 결혼한 마당에 뭔 상관이냐는 걸까. 나도 이젠 덩달아 탈모니, 대머리니 하는 단어를 서슴없이 입에 올린다.


"남편, 저 남자 대머리 될 거 같애?"


"아니. 저건 이마가 넓은 거지 대머리 될 상은 아니야."


"그럼 저 남잔?"


"저 남자도 아니야. 류미는 남편이 대머린데도 아직 구분을 못하네?"


이런 식이라 그가 탈모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하루는 병원에 다녀와서 물었다.


"남편 있잖아, 오늘 애기 데리고 병원 갔는데 글쎄 거기 의사 선생님이 머리가 한 오라기도 없는 거야. 봐봐. 완전 대머리지?"


병원 홈페이지에서 그의 얼굴을 찾아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가 사뭇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보... 너무 그렇게 한 오라기도 없다고 말하지 말아 줄래? 탈모인들은 다들 가슴에 커다란 슬픔을 안고 산다구."


"아... 미안."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슬픔을 가슴에 묻은 거구나. 말을 조심해야겠다 싶지만, 관련 농담이 생각나면 기어이 입 밖으로 내고야 만다. 이렇게 대머리라는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 부부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막상 결혼하려고 보니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최대한 간소하게 한다고 했으나, 남들 하는 건 또 거진 다 해야 했기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빴다.


때는 12월 어느 저녁, 제비꽃(구남친이자 현남편)과 결혼반지를 보고 온 날이었다. 결혼반지... 지금은 작아져서 끼지도 않는 반지를 뭐 하러 발품 팔며 돌아다녔는지 지금 와선 아 의미 없다 하지만, 여튼 마음에 드는 반지를 겨우 찾아 예약하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과 송년회 약속이 있어 노량진에 가는 길이었다. 겸사겸사 제비꽃도 데려가서 소개해주기로 했다.


"제비꽃, 친구들한테 결혼한다고 알렸어?"


"아직 다는 안 알렸어."


"왜?"


"그냥."


"아니... 지금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빨리 알려줘야 그날 약속을 안 잡을 거 아냐. 그런 건 진작 했어야지 왜 미루고 있어."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반지 사러 돌아다니면서 기력이 쇠한 것 같았다.


"알았어. 지금 할게."


그가 핸드폰을 들어 타닥타닥 자판을 쳤다. 뭐라고 쓰나 보려다가 핸드폰을 열어 내 할 일을 했다. 나도 바쁜 사람이라고.


한참 동안 자판을 치길래 슬쩍 곁눈질로 봤다. 단톡방에 불이 난 것 같았다. 화면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간간이 자판을 쳐 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보았다.


- 이야 머리 심은 보람이 있구나


??? 내가 뭘 본 거지.


"제비꽃. 방금 뭐야?"


"뭐가?"


그의 눈이 충혈돼 있었다.


"방금 카톡 뭐냐고."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뺏어서 대화를 올려 보았다. 내가 본 게 맞았다.


머리. 심은. 보람이. 있구나.


"제비꽃, 머리 심었어? 이게 무슨 소리야? 장난이지?"


"어. 심었어."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머리 심은 거 말 안 했잖아!!! 날 속였어??"


"속인 거 아냐. 말을 안 했을 뿐이지."


"말을 했어야지! 안 하면 속인 거지!!"


"속인 거 아니라니까."


"속인 거 맞지! 이건.. 이건.. 혼인빙자... 그 뭐냐 혼인빙자... 아무튼 그런 거야!"


"말하려고 했어."


"언제? 결혼식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와 진짜 미치겠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속았다는 배신감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나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심어서 이 정도라고?'


늘 데이트하면서 그의 적은 머리숱이 마음에 걸렸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진행되는 탈모인가 했다. 그런데 심었는데 저 정도라고? 원랜 어땠다는 거야?


"허.. 참나.. 하아... 제비꽃, 나는 말야. 쌍꺼풀을 비롯해서 얼굴에 손 하나 댄 곳 없고, 심지어 교정도 안 했어. 내가 만약 필러 같은 사소한 시술이라도 했으면 난 말했을 거야. 그게 상대방에 대한 예의니까."


"류미야, 넌 이 상황에서도 니 자랑이니?"


"(움찔) 아니 그냥 그랬다고! 흠흠 이렇게 속이는 건 상대에 대한 기만이야!"


"뭐가 또 기만이야... 제발 류미야... 아무 일도 아닌데 왜 또 그래..."


그가 얼굴을 감싸 쥐고 쭈그려 앉았다. 나도 피곤하게 굴고 싶지 않지만, 이건 보통일이 아니라구. 말을 안 한 건 거짓말이나 다름없다. 그럼 내가 대놓고 '혹시 머리 심었냐'고 물어봐서 ‘아니다’라고 해야지만 거짓말이 성립하니?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던 '자연미인인 줄 알았던 예신이 알고 보니 전신성형을 했더군요' 같은 사연이 생각났다. 댓글에는 성형 안 밝힌 건 사기다 뭐다 하며 온통 난리였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일을 당할 줄이야.


나는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예민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이건 결혼할 상대에게 반드시 말했어야 하는 부분 아닐까? 성형을 했으면 했다! 머리를 심었으면 심었다! 왜 미리미리 말을 안 해주냐고! 그리고 그는 내가 알아차리지 않았으면 평생 말 안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상태로 열차를 여러 대 떠나보냈다. 약속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그는 움직여줄 것 같지가 않았다. 아 근데, 속인 게 누군데 왜 본인이 더 이러냐고. 싸울 땐 늘 이런 식이었다. 본인이 나를 화나게 해놓고선, 내게 사과도 안 하고 입 꾹 다물고 본인이 더 기분 나빠했다. 그때마다 늘 내가 분노를 혼자 삭인 후에 오히려 그의 기분을 달래줘야 조금씩 풀어졌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심었어?"


"3년 전에."


"얼마 주고?"


"몰라. 비행기값까지 한 천만 원 든 거 같아."


"어디서 했는데 비행기를 타?"


"터키."


내 머릿속 한켠에 저장해 놨던 짤이 떠올랐다. 비행기 뒷좌석에서 찍은 사진에는 터키로 머리를 심으러 떠나는 대머리 남자들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아래 설명은 짧고 명확했다. "Turkish Hairlines." 터키행 모발이식 원정대. 그 멤버 중 하나였구나.  


이제는 내가 얼굴을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이를 어쩌나. 기분은 몹시 상하지만 결혼을 파토낼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푹 속이고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사과는커녕 본인 기분도 쉽게 풀지 못할 것 같았다.


20대, 아니 30대 초반만 해도 이런 일이 있으면 '다 때려쳐!' 이러고 집으로 돌아왔을 테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가 100통 정도 와야지만 조금씩 노여움을 풀고 대꾸를 했겠지. 하지만 30대 후반에 결혼을 앞둔 나는 그럴 기력도, 열정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귀찮았다.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다. 전과를 속인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털어버려야 하나?


말 나온 김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제비꽃. 근데 미안한데... 머리 심은 게 이거야? 좀 더 빽빽하게 심지 그랬어."


"이거 많이 빠진 거야. 처음에 7천 모 했어."


“한 2만 5천 모 정도 심지 그랬어.”


“그럼 죽어.”


“그렇구나. 죽으면 안 되지..."


하아... 울 아빠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머리숱이 많아서 스프레이로 꾹꾹 누르고 다닌다. 오빠도 아빠를 닮아 머리가 좀만 길면 떠서 감당이 안 된다. 그런 우리 집안에, 제비꽃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그런 비애를 유전시키게 될까?


나까지 슬퍼지려 하기 전에 분위기를 전환시켜야 했다.


"근데 너무 비싸게 했다. 우리 외삼촌... 화곡동에서 800만 원 주고 했대. 추석 때 삼촌이 이모들 앞에서 엄청 자랑하더라고. 거의 바람까지 피울 기세던데? 자긴 너무너무 만족한대. 다음엔 거기서 하자."


사실이었다. 젊을 때 약을 잘못 먹고(본인 피셜) 탈모로 고민하던 외삼촌은, 중년의 나이에 머리를 심고 자신감이 하늘까지 치솟았다. 솔직히 내가 봤을 땐 별 차이 없던데. 여튼, 다시 심는 한이 있더라도 그땐 터키로 원정 보내지 말자.


"근데 터키 어땠어? 여행도 좀 했나? 나 터키 갔을 때 너무 재밌었는데."


"난 호텔 방에만 있었어. 조금이라도 머리에 뭐 닿으면 큰일난대서. 혹시 미친 사람이 와서 머리 때리면 안 되잖아. 그리고... 그런 거 아니라도 난 외국에서 혼자 못 다녀. 무서워서."


프랑스에선 무서워서 지하철도 못 탔다더니, 터키에선 미친 사람한테 머리 맞을까 봐 나가지도 않았구나. 그 돈 주고 가서 호텔 방에만 있었다니... 에휴. 남편 될 사람이 왜 이렇게 나약하니.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저렇게 겁 많은 사람이 혼자 터키에 가서 수술을 받을 만큼 머리가 간절했다는 포인트에서 조금 짠해졌다. 그가 삶을 살며 겪었을 속상함과 우울함에 가슴이 아파왔다. 예전에 롯데월드에서도 그런 짠한 마음 때문에 그에 대한 분노를 거뒀더랬다. (편집증 시대의 연애 1탄 17화 참조)


그래, 오죽했으면 머리 심고 나한테 말도 안 했겠어. 탈모인으로 사는 비애도 무거운데, 여자친구는 그걸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겠지. 이런 것까지 감싸줘야 진정한 사랑이겠지. 역시 사랑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고된 것이었다. 나는 전신성형...은 아니지만 모발이식 사실을 말 안 한 남자친구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기로 하고, 다시는 뭐라 하지 않았다.


에필로그: 정작 본인은 머리 없는 서러움 때문이 아니라 장가 한번 가보려는 미용 목적이었다는 것을, 결혼 후 한참 뒤 신나게 떠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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