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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미 Mar 04. 2024

윗집 여자와 남편의 첫 만남

남자들의 이상형은 처음 본 여자다?

30년 된 구축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감내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녹물은 기본, 한 달에 3~4번은 단수가 되거나 온수가 안 나온다.


난방도 엉망이어서, 어느 날은 보일러를 틀어도 작은 방은 냉골이고, 또 어느 날은 아궁이 때는 한옥집 아랫목처럼 펄펄 끓기도 한다. 복도식이라 한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이 현관문을 뚫고 들어와, 현관 앞에 두툼한 커튼을 달아놓았다.


처음 전세로 들어올 때는 딱 2년만 살고 이사 가자는 마음이었다. 낡은 구축, 비좁은 평수, 서울이 아닌 입지. 이 3가지 조건은 시시때때로 나를 못 견디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2년 계약이 끝난 후에도 눈 딱 감고 2년을 더 연장했다. 처음 들어올 때 전세자금 대출을 금리 1.8%에 받았기 때문에, 2년만 더 버티면 아낄 수 있는 금액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몸테크다.


누수도 빼놓을 수 없지. 이사 왔을 때부터 욕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매일은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욕실은 매일 쓸 텐데 왜 한 달에 한 번만 물이 떨어질까? 나는 윗집 사람이 한 달에 한번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남편은 코웃음 쳤지만, 찾아보니 실제로 욕조 누수가 존재했다..!


누수 영상을 찍어 관리사무소에 전달하니, 윗집 사람이랑 얘기해 보고 알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시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 그래봐야 한 달에 한 번이고, 그것도 ‘주룩주룩’이 아니라 ‘똑똑’이라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러다 작년 장마 이후, 비 오는 날에 베란다 천장에서도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빨래 대 바로 위쪽이라 물이 떨어지면 옷에 묻었다. 천장 칠이 물에 녹아드는지 물 색깔도 허여멀건했다. 이제 진짜 조치를 취해야 할 때였다.


"어우 심하네요. 물이 천장을 타고 가서 안방까지 위협하고 있어요."


관리사무소에서 나온 직원분이 말했다.


"안방까지 누수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빨리 해결합시다. 윗집한테 연락해서 바로 진행할게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지난번 화장실은 그냥 넘어갔어도 이건 얘기가 다르다. 자다가 얼굴에 썩은 물을 맞게 생겼는데 무조건 고쳐야지.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다.


"혹시 저희 윗집이랑 얘기되셨나요?"


"아 그래야 되는데... 그.. 거기 집주인이 영국에 있어요. 어렵게 연락이 됐는데, 현재 세입자가 연락을 안 받는다 그러더라고. 우리도 난감해요. 낮에 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럼 어떡해요?"


"좀 기다려보세요. 어떻게든 연락해볼 테니까."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남편, 어떡해? 윗집에서 연락을 안 받는대."


"아... 거기 이상한 애 사나 보다. 뻔하지 뭐. 귀찮으니까 모른 척하는 거지. 어차피 공사 안 해도 자기 집은 문제없으니까. 하여튼 이기적이야 사람들이.”


"그럼 남편이 한번 올라가 볼래?"


"내가?"


"응. 가만 보니까, 관리사무소 아저씨 여섯 시에 퇴근하잖아. 윗집이 혼자 사는데 퇴근을 늦게 하면 서로 마주칠 수가 없는 거지. 집주인 연락을 왜 안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둘이 뭔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남편이 한번 가봐."


"글쎄... 요새 하도 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 엮이기 싫은데."


하긴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르지. 층간 소음 때문에 싸우다가 살인도 나고 막 그러는 세상인데, 뭔 일 생기기 전에 미리 조심하는 게 낫다. 게다가 계속 연락을 씹고 있는데 이상한 사람일 확률도 있긴 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우리 한 10분 있다 도착하거든요? 집에 계시죠?"


"누구세요?"


"누수 공사하는 사람인데요. 못 들으셨어요?"


"네."


"윗집만 공사할지 사모님 댁도 할지는 가서 상태 보고 할게요."


"아... 네."


공사 업체들은 대개 시간 약속 안 하고 자기들 편할 때 들이닥친다.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진 모르겠지만, 여튼 공사를 한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작업자들이 도착해 베란다와 화장실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베란다는 방수 공사를 해야 돼요. 화장실은 윗집만 하면 되고."


두 시간쯤 걸려 천장에 뭔가를 막 쏘면서 우리 집 베란다 방수 공사를 끝냈다. 작업자들이 나가자마자 윗집에서 드릴 소리가 들렸다. 금방 끝나겠지 했던 소음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꽤 큰 공사인 듯했다.


그날 저녁, 남편이 퇴근했을 때 나는 아기 옷을 개고 있었다.


"공사 잘했어?"


"응. 우리 집은 간단히 했는데, 윗집은 오래 걸린 거 같더라구."


그때,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남편이 문을 열자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윗집인데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공사한 곳 확인해야 해서요."


"네 들어오세요."


나는 앉은자리에서 목례하며 간단히 인사했다. 여자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조금 진한 화장에 긴 단발을 하나로 묶었고, 옷은 뭐랄까...맵시 있게 잘 입는 편 같았다. 그녀가 나를 지나 베란다로 나가는 순간, 희미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나는 (멋대로) 직감했다. 미혼, 애는 없음, 만약 결혼을 했다면 현재는 이혼했을 것임.


보통 외부인이 오면 내가 응대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그러기가 귀찮았다. 얌전히 집안일하는 애 엄마처럼 보이기로 했다.


여자는 베란다를 휙 둘러보고 화장실 천장도 보고 말했다.


"제가 이제 퇴근하느라 공사하는 걸 못 봤어요. 영수증 보니까 공사비가 180만 원이더라고요."


"아 진짜요? 많이 나왔네요."


남편이 말했다.


"네. 비용은 집주인이 내는 거니까 뭐... 잘 봤어요."


그녀가 신발을 신고 나가다가 말했다.


"맞다, 공사한 곳 사진 찍어야 하는데."


"그럼 다시 들어가서 찍으셔도 돼요."


"혹시 사진 찍으신 거 있나요?"


"네 저는 찍어놨어요."


"사진을 저한테 주실 수 있나요?"


"아... 네. 근데 어떻게 드리죠?"


"핸드폰 번호 알려드릴게요. 010..."


남편은 불러주는 핸드폰 번호를 찍어서 사진을 그 여자에게 전송했다. 아니, 본인이 다시 들어와서 사진을 찍으면 간단할 걸 뭐 번호까지 알려주면서 보내달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자가 떠나고 남편과 식탁에 앉았다. 남편이 말을 꺼냈다.


"근데… 윗집 이상한 사람 아니었네."


"그러네."


"근데… 왜 이 시간에 퇴근하지?"


"왜긴. 일곱 시쯤 퇴근하는 게 이상해? 남편도 방금 퇴근했잖아."


"뭐 그렇긴 한데…"


그의 얼굴에 뭔가 묘하게 생기가 돌았다. 에이, 설마… 나이도 본인보다 한참 많아 보이는데, 아무리 꾸미는 스타일이라도 남편이 관심 가질 리가 없지.


"근데… 뭐 하는 사람일까?"


"모르지. 그냥 회사 다니겠지 뭐."


평소 사람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나지만, 이 경우에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근데… 나이가 몇 살로 보였어? 한 40대 후반 같지?"


"응 그렇더라. 이거 시금치 맛있지? 엄마가 준 참기름으로 무친 거야."


“응 맛있네.”


한참을 밥을 먹다 남편이 말했다.


“근데… 왜 집주인 연락을 안 받았을까?”


나는 알았다. 이 인간이 근데 근데 거리면서 윗집 여자 얘기를 계속 하고 싶구나. 이성적인 관심인지 순수한 호기심인지 모르지만, 여튼 그 여자를 계속 화제에 올리고 싶은 건 확실했다.


“몰라. 둘이 사이 안 좋은가 보지.”


짜증이 났지만 꾹 참고 대답했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라.


“우리… 아까 준 핸드폰 번호 저장해서 뭐 하는 사람인지 한번 같이 볼까?”


남편 얼굴에 뭔가 수줍은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 진짜. 저 수줍은 표정 뭔데. 나는 기어이 폭발했다.


“왜 이렇게 윗집 여자한테 관심을 가져?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마음에 들어? 어? 그럼 번호 저장해서 연락을 해보든가. 아니면 아예 지금 올라가서 궁금한 거 꼬치꼬치 물어봐! 진짜 짜증나게.“


남편의 얼굴에서 수줍은 미소가 사라지고 모멸감을 동반한 불쾌함이 떠올라 있었다. ‘너는 나를 그렇고 그런 인간으로 보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거 같았다.


나는 숟가락으로 남은 밥을 떠서 입에 가득 집어넣고 방에 들어왔다. 공사한다고 하루종일 일도 못하고 집 지킨 마누라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는 안 궁금하고, 저딴 윗집 여자 신상이 궁금하냐? 앞으로 내가 밥 해주나 봐라. 윗집 가서 먹고 오라지. (그런다고 진짜 먹고 오기만 해보라지)



다음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공사 잘했어?”


“응 잘했어. 아빠… 내가 어이없는 얘기 해줄까? 어제 공사한 윗집 여자가 저녁에 왔었거든? 굳이 남편한테 핸드폰 번호 알려주면서 공사한 곳 사진을 보내달라는 거야. 근데 나중에 남편이 뭐라는 줄 알아? 그 여자 번호 저장해서 카톡 프로필 보고 뭐 하는 사람인지 같이 확인해 볼까? 이러는 거야. 내가 어이가 없어서…"


‘뭐야? 이런 고얀 놈이… 감히 내 딸을 두고 다른 여자를 궁금해해? 가서 아주 혼쭐을 내줘야지!‘


라고 말할 줄 알았던 아빠가 이상한 말을 했다.


“으이구 멍청해가지곤… 나중에 번호 저장해서 지 혼자 몰래 보든 해야지. 그걸 너한테 물어보냐?"


???


“아빠… 사위를 혼낼 생각을 해야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 그래 남자는. 니가 몰라서 그렇지, 다 그런 거야."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자식 가재가 아닌, 피 안 섞이고 성별만 같은 게 편을 드는 걸 보고 어이가 두 배로 없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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