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미 Mar 11. 2024

결혼식에서 이빨 드러낸 신부

내 맘인데요

나는 2021년 초에 결혼했다. 하필 코로나가 가장 극성일 때라 결혼식 규정이 엄격했다. 신랑 신부는 각각 25명의 하객만 초대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대가족 출신이라 형제자매만 합쳐도 15명에, 그들의 가족과 손주들까지 하면 100명이 넘었다. 그리고 평소 사람 좋아하던 나(확신의 ENFP)는 늘 내 결혼식엔 몇 명이나 올까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25명이라니.


좀 슬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혼식을 미룰 여유도 없었거니와, 돈도 없고 나이 들어서 결혼하는데 뭐 그리 성대하게 할 일인가 싶기도 했으니.


하지만 결혼식은 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 헤어 메이크업 실장님한테 헤어를 약간 볼륨 있게 해 달랬더니 뽕을 엄청 넣어서 콘헤드를 만들어놓음


2. 별관에 있는 신부 대기실이 아니라 로비에서 인사하려고 나갔는데, 관리인이 신부 때문에 사람 몰리니까 들어가라고 윽박지름


3. 신부 대기실로 쫓겨 들어가서 분해서 폭풍오열. 도우미 이모님이 대기실에서 이렇게 우는 신부는 처음 봤다고(..)


4. 번호표를 받아야 신부대기실에 들어올 수 있는데, 들어왔던 사람들이 번호표를 반납 안 해서 상당수의 손님들이 신부대기실에 못 들어옴


5. 미리 약속된 25명만 식권을 받을 수 있고 나머지는 답례품을 받는데, 식권 리스트에 없는 누군가가 식권을 가져가서 늦게 온 지인이 식권을 받지 못함. 지인은 왜 일을 왜 그딴 식으로 하냐고 축의금 받던 내 사촌동생을 혼냄(..)   


6. 단체사진 찍을 때조차 마스크를 못 벗게 해서, 사진을 봐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없음


7. 식사 시 테이블당 한 명씩만 앉게 했는데, 신랑 신부도 예외는 없어서 신랑 뒤통수 보면서 밥 먹음


아름답고 화려한 결혼식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별일 없이 진행되길 바랐을 뿐인데... 마음처럼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난 슬퍼서가 아니라 화딱지가 나서 신부대기실에서부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좋은 날이고, 평생에 한 번밖에(아마도) 없을 날이니 좋게 하자고 스스로를 달래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입장시간이 임박하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뚝 그쳤다. 아주 뚝. 그리고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식장 문이 열리기 직전, 심호흡하며 활짝 웃었다. 이제부턴 기분 좋게 하자. 나의 날이니 즐기는 거야.


문이 열리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빠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저 앞에 나를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날 보고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래, 웃자. 나를 축복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울일이 뭐가 있어. 활짝 웃으며 걸으니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다.


버진로드를 반 정도 걸었을 때였다. 옆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신부 입 다물어라!"


???


목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어떤 할머니였다. 할매 누구야? 누군데 남의 결혼식 망치려고 작정했나? 옆에서 손녀로 보이는 사람이 말리는 게 보였다. 결혼식이고 뭐고 당장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우리 쪽 사람은 아니니 남편 친척이렷다.


가까스로 진정했던 마음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이 결혼식 당장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었다. 아빠가 남편에게 내 손을 건네줄 때 얼굴은 굳고 눈에는 다시 눈물이 차 있었다. 기를 쓰고 겨우 진정했는데, 어? 내 결혼식에서 좀 웃을 수도 있지. 할매가 뭔데 나더러 입을 닫으라 마라야, 어?


남편이 내 표정을 읽고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괜찮아?"


"아니."


나는 남편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모든 게 최악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으려 애썼고, 결혼식을 큰 사고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나쁜 일 위주로만 써서 그렇지, 사실 내 결혼식이 별로였던 건... 맞다. 하지만 주례보신 분이 말하지 않았나. 결혼식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 되어선 안 된다고. 앞으로 함께 살 날이 많은데 결혼식에서 피크를 찍고 이후 하향곡선을 그려서야 되겠느냐고. 그 말을 금과옥조처럼 믿고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초반에 위기는 있었지만, 이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



그로부터 3년 후. 지난달 그 할머니(알고 보니 남편네 친척이었음)의 손자 결혼식이 있었다. 무려 플라자 호텔에서, 그것도 축의금을 받지 않는 결혼식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은마아파트에 거주하고 강남에 건물이 몇 채 있는 부자였다.


한 번은 시부모님과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할머니 집에 들렀었다. 잠시 앉았다가 나오려는데, 아기 옷 사주라면서 돈뭉치 두 다발을 땅에 던졌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금액이라, 허리를 굽혀 넙죽 줍는 기분이 꽤 괜찮았다. 집에 가서 세어보니 2백만 원이었다. 재력만큼 화끈하시네. 이 정도 되니까 남의 결혼식에서 큰소리 뻥뻥 치나보다 했다.


나는 아기를 데리고 남편과 결혼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식이 다섯이라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남편의 고모만 한복을 입고 옆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직계가족도 아닌데 왜 고모가 한복을 입고 있지? 알고 보니, 할머니 자식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안 온 것이다. 자기들끼리 연락을 아예 안 하고 산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조카가 결혼하는데 안 와보나? 엄마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와야 하지 않나?


결혼식은 무척 화려하고, 성대하고, 지루했다. 사회는 아나운서, 주례는 국회의원, 축가는 뮤지컬 배우가 맡았다. 2000년대 초반 같은 결혼식이었다. 요새는 주례 있는 결혼식이 오히려 드물고, 축가는 친구들이 해주고, 사회는 절친이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의미 있는 결혼식만 다니다가 오랜만에 이런 결혼식에 오니 낯설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하객 수였다. 신랑 신부 둘 다 40대 초반에 일반 회사원인데도 동년배 하객이 어마어마하게 왔다. 친구와 지인 단체 촬영은 꽉 채워 2번을 교대로 찍었다. 보통 20~30대 초반 때, 그것도 친구가 많은 사람이 결혼해야 이 정도고, 30대 중반부터는 이 정도 인원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작게 말했다.


"하객 알바 쓴 거 같아."


역시 그런 듯했다. 심증일 뿐이지만 많은 여건을 놓고 보니 그랬다. 결혼식 5분 전까지 텅텅 비어 있던 실내가 갑자기 들어차는 것 하며, 다들 멀찍이 떨어져서 우와... 하면서 심드렁하게 박수치는 것 하며, 그리고 이렇게 친구가 많으면 앞다퉈서 사회를 보겠다 축가를 하겠다 난리를 칠 텐데, 사회와 축가 모두 돈 주고 산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주례는 국회의원이니 당연히 돈이지. 뭐, 진실은 모르지만.


결혼식 후 나오면서 할머니와 마주쳤다. 고모의 부축을 받고 있는 할머니가 의기소침해 보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 결혼식에서 큰소리치는 당당함과 용돈을 바닥에 던지는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이 들수록 이런 날 내 옆에 사람을 거느려야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까? 아무리 부자라도 자식끼리 안 보고 살면 그것만큼 속이 상한 일이 있을까. 받을 유산이 많은 집이 오히려 자식끼리 사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뭐, 이것도 진실은 모르지만.


이런 결혼식보단 내 결혼식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축하해 줬으니까. 친구들 한 명이라도 더 들여보내라며 한복 입고도 식장에 안 들어와 준 이모들, 1월 강추위에 단체 사진 찍는다고 식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린 친구들, 웨딩카를 꾸며준 동생들, 고가의 음향 장비를 빌려준 선배, 추위에 떨며 답례품 나눠준 오빠들, 신부대기실에서 우는 내 곁에서 쌍욕 하며 웃겨준 친구, 서로 싸우고 10년을 연락 안 하다가 내 결혼식에서 만나 회포 풀고 같이 차 마시러 나간 대학 동기들, 청첩장 못 줬는데 어디서 소식 듣고 보내준 축의금들(심지어 결혼 1년 지나고 이제 알았다며 축의금 보내준 선배도 있었다)...


결혼식은 망ㅋ했지만,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날 남편이 건반을 치며 불러준 축가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지나 보면 그뿐, 흘러간 일을 곱씹으며 아쉬워할 필요 없겠지. 그냥 활짝 웃으면 되겠지. 보란 듯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