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N8kJibcQnHY
세검정 오른편에 놓인 고즈넉한 길,
세검정로 6길을 걸어보았다.
내 기억으로,
영화 ㅈㅇ 여주인공의 하굣길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 같다.
천천히 걷다 보면, 아담한 성당이 나온다.
타 지역에서는 이미 보기 힘들어진
우유 대리점과 신문보급소가 눈에 띈다.
지독하게 상투적이지만
시간이 멈춰져 있다는 표현이
너무나 어울리는 공간이다.
사소한 이야기 1>
세검정!
나무 아래, 운치 있는 정자와
커다란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면
작은 일에 화내고 싸우며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기에 더 아름답다.
사소한 이야기 2>
보충 촬영을 위해
한 번 더 세검정을 찾았는데,
이 날은 눈이 조금 쌓여있었다.
여행 중, 혹은 산책 중에
찾아오는 눈은 보통 반가운 존재다.
그러나
가끔은 악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오래오래 전 일이다.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철학자의 길이라니!
거리 이름치곤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독일이 워낙
많은 철학자를 배출한 나라고
하이델베르크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대학 도시이므로
아주 뜬금없는 명칭은 아닌 듯싶다.
유럽 여행 중이던 나는
가이드북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했다.
‘커피캔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걸으며
철학자의 길에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라.’
여행의 피로감이 누적되었던,
당시의 나는 그 권유를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날,
학술대회가 진행 중이었고
그 바람에 숙소를 잡지 못한 나는
허둥지둥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만 했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 거리에 가봐야 별 볼 것도 없다고.
그저 평범한 산책로일 뿐이라고.
물론 그 말은 내게 위안이 되지 못했다.
서울에 와서도 아쉬움은 줄지 않았고
급기야 다음 해 겨울,
나는 프랑크푸르트 직항을 예약했다.
물론 철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다.
프랑크푸르트는 이미 체류한 적이 있었으므로
지체 없이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다음 날은 오직 철학자의 길을 위해 존재했다.
다른 스케줄 같은 것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떠보니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눈 쌓인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나는 그야말로 분기탱천 상태였다.
그런데...
모처럼 사색의 시간을 갖겠다는 나의 야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색은커녕 그냥 걷기에도
(바닥이) 너무나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커피캔을 호주머니에 넣고
두 손으로 벽을 잡고 걸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도 여의치 않아
네 발로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다.
달리 체면을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
거리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그 말은 내가 넘어지더라도
아무도 챙겨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순간 내가 집중해야 할,
단 하나의 생각은 ‘어떻게든 넘어지지 말자!’였다.
숙소에 틀어박혀 종일
저린 다리를 주무르던 나는
어두워져서야 비로소 이불밖에 나왔다.
‘황태자의 첫사랑’의 주무대인
선술집 ‘레드옥스’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낮 시간의 아쉬움을 달래 보려고.
그러나 겨울이어서인지
‘레드옥스’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은 말했다.
들어가 봐야 별거 없다고.
그냥 평범한 술집일 뿐이라고.
물론 이번에도 별반 위로가 되지 못했다.
숙소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육개장을 원했으나 소고기에 문제가 생겨,
닭개장을 먹어야 했다.)
이 추운 겨울에
나는 왜 이 멀고 먼 독일에 온 것일까?
이런저런 아쉬움 때문에 ‘철학자의 길’은
내게 (미련이라는 소스가 잔뜩 묻어있는)
꽃이 되어 버렸다.
한 번 더 하이델베르크행을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쯤 되면 집착인 것 같아
그만 두기로 했다.
세검정 근처에서>
대학가인데도 유니크한 카페가 드물어서
이곳 학생들은
부암동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둘러보면
어디든 괜찮은 카페가 있기 마련이다.
근처에서 내가 가끔 찾는 곳은
게으르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L카페다.
이름과 달리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