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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이블 Jul 11. 2021

영수증

   <모녀시집>은 늘 딸 아이가 먼저 시를 썼고 엄마인 나는 그것을 보고 나서 느끼고 생각나는 것들을 시로 뒤따라 가보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번의 시는 '영수증'이라는 제목으로 순서를 바꿔보았다. 내가 먼저 시를 썼고 그것을 보고 나서 딸 아이가 써 본 것이다. 때론 미끄럼틀을 거꾸로 타보고 싶을 때가 있듯이 한번은 내가 먼저 건너간 강 너머에서 징검다리 통통거리며 건너는 딸아이를 기다려 보고 싶었다. 먼저 건네 놓고 뒤따라가는 엄마의 마음보다 훨씬 설레고 조마조마했으나 시도해보길 잘한 것 같다. 이제 딸아이도 세상을 들여다보는 엄마의 눈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으니까.


  엄마의 시를 먼저 감상해 보시길...



  <영수증>


 언제부터였을까

 숫자가 내 삶에

 내려앉기 시작한 것은


 물건을 들여 놓는다

 숫자가 올라간다


 맛난 것을 맘껏 먹는다

 숫자가 올라간다


 아이들의 학원 버스가 늘어난다

 숫자가 올라간다


 엄마,

 야구 장비가 낡았어요

 엄마,

 스케이트가 작아졌어요


 양손이 묵직해지고

 다시 숫자가 올라간다


 그날 밤,

 창가에 둔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둔

 영수증 묶음


 어디쯤에서

 숫자들이 반란해주기를...


 어,

 숫자가 없다

 조용히

 내 걱정을 태워버린

 감열지 영수증


 백지가 된 영수증이

 지나간 햇빛과 함께

 나에게

 윙크하는 저녁


                    - 테이블

 


  가끔 지출내역을 정리하다 보면 스스로 눈감아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이번 달 지출 상한선을 넘긴 것을 알고 있지만 지체할 수 없는 지출이었다는 판단이 들 때, 영수증 상자에 일단은 넣어 놓고 잠시 잊는 것이다. 어느 날, 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감열지 영수증은 창가 햇빛 아래서 숫자의 흔적을 없애버렸다. 열로 태워서 새긴 숫자를 다시 열로 날려버린다는 게 장난같았지만 한번쯤 눈감아 주는 인생 센스라고 여기는 수밖에. 이런 나의 시를 보고 딸아이도 영수증이 주는 양면의 감정을 잘 포착한 걸까?



  <영수증>


  상쾌한 쇼핑

  상쾌한 지출

  상쾌한 정신


  불쾌한 지갑

  불쾌한 통장

  불쾌한 후회


  언제나 나를 향해 웃어주지만

  언젠가 화살이 되어 다시 돌아오는


  설렘과 불안감을 함께 안겨주는 그


  그 는 바 로


  영수증


  어쩔까?


  찢!었!다!


                      - H. Y. S



  엄마의 영수증은 백지가 되었는데 딸아이의 영수증은 찢겨졌다. 영수증을 찢는 그 마음이 내 마음.




<사진출처>

https://brunch.co.kr/@idb/72 

https://ccmwdream.tistory.com/4

https://zoommastory.com/3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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