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치타가 새끼를 놓고 홀로 나타났다. 한 달쯤 지나 중성화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눈치가 빨라 이동장에 절대로 들어가질 않는다.
아마 이때에도 임신을 했었나 보다.
치타는 현재 임신 2개월쯤 된 것 같다.
대신 배가 고파 못 견딘 젖소가 이동장 안으로 머리를 박고 궁둥이와 뒷다리는 밖에 놓고 캔 사료를 먹느라 정신이 없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솜뭉치 이불을 구겨 드럼 세탁기에 넣듯 다소 젖소의 몸집에 비해 작은 이동장에 젖소의 궁둥이를 밀어 넣었다. 도망갈 줄 알고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금, 토, 일요일 여행을 다녀오느라 먹이를 주지 못했는데 아사 직전인가 보다. 이 날이 고양이를 포획할 기회라고 생각한 것도 계산에 들어 있긴 했다.
다음날인 월요일 아침까지 갇혀있어 힘들었을 텐데, 무사히 수술도 마치고 돌아왔다.
한쪽 귀 끝은 잘려서 왔는데 일주일 정도는 뭐가 묻은 건지 진물이 나온 건지 얼룩이 있었다.
요염한 젖소 ㅋㅋ 오른쪽 귀가 잘려있다
한편 치타는 먹이로 유인해도 절대 이동장에 들어가지 않고 거리를 두고 경계를 했다. 보호본능이었을까? 설마 했는데, 출산 후 바로 임신이 되었나 보다.
산책에 따라와서 요염한 모델 포즈로 쉬고 있는 치타 :)
치타가 캥거루가 되었다.
두 번째 임신이라서 인지 배도 더 나오고 젖꼭지도 부풀어 올랐다.
젖소를 중성화시킨 게 왠지 미안해서 젖소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게 된다. 먹이를 주면 머리를 들이밀고 목덜미도 비벼대면서 갖은 애교를 부린다. 그런데 먹이를 다 먹고 나면 경계하고 도망간다. 기뻤다가 이내 섭섭해진다.
동물과 교감하는 게 인생에 있어 처음이라 무척 애착이 간다. 어렸을 적 시골 할머니 댁에 개는 너무 커서 도망 다녔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는 일주일 만에 동내 개에게 물려 죽었다.
왜 진작 돌아보지 못했을까? 이 지구가 인간만의 지구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본다. 비행하느라 동물을 키우기엔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음을 위안삼아 본다. 승무원 동기 중에 강아지를 키우는 친구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집을 자주 비우다 보니 강아지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우울증을 앓았다. 그래서 2마리를 길렀는데, 그리 많은 변화는 없었다. 그래서 한 마리를 더 입양해서 3마리를 길렀는데 막내가 몇 달 후에 죽었다. 주변에서 어려움을 겪는 걸 보고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20년 전, 프랑스에 비행을 가면 공원이나 길거리에 개똥이 너무 많고, 연인들의 애정행각도 너무 노골적 이서 정말 싫었던 것 같다. 게다가 '프랑스 사람들은 출산율이 낮고 개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애완동물 기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철학이 발달했지만 신을 잃어버리니, 신과의 아가페적인 사랑도 잃어버리고, 인간끼리의 사랑도 깨지고 결국 동물로부터 위로를 받고 사는구나.' 싶어서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동물이 주는 사랑이 참으로 큼을 느낀다. 상호 교감을 하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이 참으로 좋다.
사랑스럽고 그저 사랑해주고 싶은 동물들을 보면서, 창조주가 만물들을 통해 신의 사랑을 느끼라고 창조하셨음을 느낀다. 인간 부모는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지만 신은 우리에게 만물을 창조해 주시고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창조주의 스케일을 보라!)
승무원 시절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하면서 인류 문명의 발달로 인해 만들어진 많은 건축물, 예술품, 도시 등을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자연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야 스스로 존재하게 하는 자연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지 창조를 그린 미켈란 젤로도 기고만장해서 '나는 역시 천재야.' 했다가 작품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노을을 보고 신의 작품에 감탄하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고 하지 않는가!
예술의 영감! 그 근본은 바로 창조주로부터 받아야 살아 있는 예술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60도 써라운드 모래만 보이는 사막 한가운데 나는 정말 작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시니 유일한 존재가 됨을 고백하며 감사함에 눈물이 흐르던 두바이의 사막 투어, 옥빛과 에메랄드 혹은 코발트 색의 중간쯤 되는 바다 한가운데 피지의 무인도에서의 여행, 끝없이 이어지는 알프스 산맥들이 너무나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던 스위스에서의 여행길, 사막 한가운데 건설된 화려한 조명이 빛나고 엄청난 규모의 댐이 있는 라스베이거스에서도 나는 만들어진 것을 보고, 만드신 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작품을 보고 작가의 의도와 그 생각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연구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세계를 보고 여행하는 시간이 그러한 시간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도 무언가를 보고 좋은 영감이나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깨달음이 온다면, 이름은 달라도, 형태가 달라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의 근본은 하나님이심을 나는 확신한다.
보다 차원이 높은 자의 사랑은 무한하기때문이다.
그러나사연이 있고 나를 잘 따르는 고양이가 더 눈길이 가고 애착이 가듯, 신도 그러하겠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고양이가 할퀴면 속상하지만, 고양이니까 그 특성을 알고 대하려고 노력하지, 미움이 생기지는 않는다.
사람도 이렇게 대해야 했었나 보다. 고양이 같은 성격의 사람, 강아지 같은 성격의 사람, 여우 같은 성격의 사람.
그동안 나는 무수히 어떤 바름과 옳음의 기준을 놓고 상대를 평가하고 재단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힘들었나 보다.
그저 파악하고 이해하고 대처하면 되었는데, 상대만 보느라 나의 할 일을 하지 못했다. 감정의 쌓인 것들을 다 풀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