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올 거지? 꼭 와야 해?”
김밥 주문하듯 가뿐한 딸아이의 목소리가 나에겐 무거웠다. 학부모 상담을 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참관수업이었다. 아이가 알림장을 내밀었을 때 나는 도저히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솔직히 참관수업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하면 나쁜 엄마일까?
사실 학부모 상담은 저번 달이었으므로 유치원에서는 나름 한 달의 텀은 준 것이었다. 하지만 하필 저번주에 같은 반 아이가 코로나에 걸려서 전원이 자가격리를 했다. 접촉자가 격리해야 하는 규정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도 전업 엄마들이 단체대화방에서 의견을 모아 유치원에 건의했다. 유치원에서야 홀가분하게 오케이했을 것이다. 말로는 ‘부득이한 경우 등원 가능’이라고 했지만 그말이 더 짜증스러웠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유치원이? 아이가?
그래. 유치원이. 저번주에 일주일이나 격리를 했으면 참관수업은 융통성 있게 좀 뒤로 미뤘어야 하는 것 아닌지. 꼭 그렇게 원래 일정대로 꾸역꾸역 해야만 하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만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솟구쳤다.
아이는 차에서 내려 깡총깡총 뛰어 들어갔다. 같은 가방을 멘 친구 세 명을 만나 손을 흔들고 재잘거린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자 엄마 세 명이 웃으며 돌아선다. 아마도 아침부터 밥을 준비하고 아이 옷을 입혀 등원시킨 그녀들은 잠시 숨 좀 돌리자며 근처 카페로 향할 것이다. 두어시간 쯤 ‘숨을 돌린’ 다음 각자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두시에 있을 참관수업으로 향하겠지.
나는 눈앞의 빨간불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나는 두시에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물론 회사에는 미리 말해두었다. 아이가 내리기 직전 반드시 가겠노라 손가락으로 약속도 했다. 그런데 이 몹쓸놈의 만성적인 불안감은 없어지질 않는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 프로젝트가 불바다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한달 전부터 말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알 필요도 없다.
다 된 프로젝트였는데 갑의 업체에서 갑자기 예산이 잘렸다고 계획을 수정하라고 나왔다. 임박한 기한을 맞추느라 모두가 매달려 수정하고 있는 참이었다.
물론 실무야 팀원들이 다 한다지만 워낙 촉박하다보니 밤 열한시에도 메일이 들어왔다. 그럼 내가 얼른 컨펌을 해 줘야 그들이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철야를 불사할 걸 뻔히 알기에 컨펌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두시부터 네시까지 있을 참관수업을 위해 앞뒤로 한시간씩을 더 비운다는 건, 그 시간 동안 팀원들의 업무가 올스톱된다는 말이었다. 벌써부터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드르륵.
운전대 앞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 대리였다. 숨이 막혔다. 출근시간도 되기 전에 전화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뒤에서 빵 하고 경적소리가 울렸다. 그제서야 불이 바뀐 걸 발견하고는 브레이크를 놓았다. 전화는 여전히 울렸다. 나는 긴장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뒤차가 무섭게 쫓아왔다. 얼마 전부터 저릿하던 손목에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응, 정 대리.”
「팀장님, 큰일 났어요.」
「인쇄 업체에서 수량을 줄이면 단가 구간이 달라진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퀄리티를 줄여야 할 것 같아요.」
눈앞이 아찔했다. 현수막과 인쇄물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갑이 우리 회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회전과 동시에 온 정신이 회사로 내달렸다. 가슴 한켠에 무언가 채무사항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꺼내볼 엄두를 못 냈다. 오전 내내 상대 업체와 통화하고 회의를 거듭했다. 업체는 수량을 갑자기 바꾼 것에 대한 불만을 우리에게 쏟아냈다. 나는 백번 죄인이 된 느낌으로 양해를 구했다.
열두시, 점심을 챙겨먹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한시에는 출발해야지, 생각했다.
열두시 반, 아직 시간이 좀 있네, 하고 생각했다.
열두시 오십분까지만 해도 시계를 분명 봤다.
그런데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을 때는 이미 한시 반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예솔이 수업은 갔어?」
남편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당신은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전화했겠지, 하는 말이 목구멍 다음으로 넘어오질 않는다. 문제 해결이 먼저다.
“아니, 못 가. 내가 엄마한테 부탁할게.”
「지금 와서? 나보고 또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해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은 줄곧 회사를 그만두고 쉬라고 했다. 그는 항상 나를 배려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말엔 모순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 15년 경력을 포기하는 것보다 그의 12년을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인지 배려를 베푸는 위치에 있었다.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건 나였다.
세시가 넘어서야 사태가 일단락됐다. 부랴부랴 조퇴할 준비를 하는 나에게 사장은 클라이언트의 중점 의뢰사항을 놓쳤으니 고과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번에도 성과등급은 B를 주겠단 소리였다.
내 신경은 남아나 있지 않았다. 팽팽해지다못해 이미 다 터져 너덜너덜해졌다. 사방이 꽉 막힌 벽이었다. 여기 치이고 저기 치여도 터뜨릴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거의 다 도착했는데 좌회전 신호가 너무 길었다. 불이 바뀌자마자 정신없이 차를 꺾었다. 유치원으로 들어가려면 한번 더 유턴을 해야 했다. 세시 오십분, 엄마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끝났어.」
얼굴 근육이 절망스럽게 이지러졌다. 핸들을 잡은 손에 벌겋게 힘이 들어갔다. 손과 팔뼈 사이가 텅 빈 것처럼 시큰거렸다. 너무 아파 한손으로만 유턴했다. 겨우 주차를 마쳤을 때, 차를 노려보는 딸아이의 얼굴은 시뻘겋게 얼룩져 있었다.
“엄마 필요 없어!”
“예솔아!”
딸아이는 울면서 걸어가버렸고 나는 그 뒤를 정신없는 여자처럼 따라갔다. 엄마가 뒤에서 따라오며 물었다.
“손목은 아직도 아픈 거야? 그러니까 진작에 병원 좀…….”
“지금 그게 중요해?”
어디에도 터뜨릴 수 없는 화가 그쪽으로 터지고 말았다. 이번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