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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 Mar 26. 2023

워킹, 맘

직장인 3분소설

“엄마, 올 거지? 꼭 와야 해?”


김밥 주문하듯 가뿐한 딸아이의 목소리가 나에겐 무거웠다. 학부모 상담을 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참관수업이었다. 아이가 알림장을 내밀었을 때 나는 도저히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솔직히 참관수업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하면 나쁜 엄마일까?


사실 학부모 상담은 저번 달이었으므로 유치원에서는 나름 한 달의 텀은 준 것이었다. 하지만 하필 저번주에 같은 반 아이가 코로나에 걸려서 전원이 자가격리를 했다. 접촉자가 격리해야 하는 규정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도 전업 엄마들이 단체대화방에서 의견을 모아 유치원에 건의했다. 유치원에서야 홀가분하게 오케이했을 것이다. 말로는 ‘부득이한 경우 등원 가능’이라고 했지만 그말이 더 짜증스러웠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원망스러웠다. 무엇이? 유치원이? 아이가?


그래. 유치원이. 저번주에 일주일이나 격리를 했으면 참관수업은 융통성 있게 좀 뒤로 미뤘어야 하는 것 아닌지. 꼭 그렇게 원래 일정대로 꾸역꾸역 해야만 하는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만의 질문이 꼬리를 물고 솟구쳤다.


아이는 차에서 내려 깡총깡총 뛰어 들어갔다. 같은 가방을 멘 친구 세 명을 만나 손을 흔들고 재잘거린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리자 엄마 세 명이 웃으며 돌아선다. 아마도 아침부터 밥을 준비하고 아이 옷을 입혀 등원시킨 그녀들은 잠시 숨 좀 돌리자며 근처 카페로 향할 것이다. 두어시간 쯤 ‘숨을 돌린’ 다음 각자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두시에 있을 참관수업으로 향하겠지.


나는 눈앞의 빨간불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나는 두시에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물론 회사에는 미리 말해두었다. 아이가 내리기 직전 반드시 가겠노라 손가락으로 약속도 했다. 그런데 이 몹쓸놈의 만성적인 불안감은 없어지질 않는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이는 내 프로젝트가 불바다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한달 전부터 말한 일이라는 것만 기억한다. 여섯 살짜리 아이가 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알 필요도 없다.


다 된 프로젝트였는데 갑의 업체에서 갑자기 예산이 잘렸다고 계획을 수정하라고 나왔다. 임박한 기한을 맞추느라 모두가 매달려 수정하고 있는 참이었다.


물론 실무야 팀원들이 다 한다지만 워낙 촉박하다보니 밤 열한시에도 메일이 들어왔다. 그럼 내가 얼른 컨펌을 해 줘야 그들이 다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철야를 불사할 걸 뻔히 알기에 컨펌 지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두시부터 네시까지 있을 참관수업을 위해 앞뒤로 한시간씩을 더 비운다는 건, 그 시간 동안 팀원들의 업무가 스톱된다는 말이었다. 벌써부터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드르륵.


운전대 앞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 대리였다. 숨이 막혔다. 출근시간도 되기 전에 전화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뒤에서 빵 하고 경적소리가 울렸다. 그제서야 불이 바뀐 걸 발견하고는 브레이크를 놓았다. 전화는 여전히 울렸다. 나는 긴장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뒤차가 무섭게 쫓아왔다. 얼마 전부터 저릿하던 손목에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응, 정 대리.”

「팀장님, 큰일 났어요.」


「인쇄 업체에서 수량을 줄이면 단가 구간이 달라진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퀄리티를 줄여야 할 것 같아요.」


눈앞이 아찔했다. 현수막과 인쇄물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갑이 우리 회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우회전과 동시에 온 정신이 회사로 내달렸다. 가슴 한켠에 무언가 채무사항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꺼내볼 엄두를 못 냈다. 오전 내내 상대 업체와 통화하고 회의를 거듭했다. 업체는 수량을 갑자기 바꾼 것에 대한 불만을 우리에게 쏟아냈다. 나는 백번 죄인이 된 느낌으로 양해를 구했다.


열두시, 점심을 챙겨먹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한시에는 출발해야지, 생각했다.

열두시 반, 아직 시간이 좀 있네, 하고 생각했다.

열두시 오십분까지만 해도 시계를 분명 봤다.


그런데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을 때는 이미 한시 반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예솔이 수업은 갔어?」


남편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당신은 점심을 다 먹고 나서 전화했겠지, 하는 말이 목구멍 다음으로 넘어오질 않는다. 문제 해결이 먼저다.


“아니, 못 가. 내가 엄마한테 부탁할게.”
 「지금 와서? 나보고 또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해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은 줄곧 회사를 그만두고 쉬라고 했다. 그는 항상 나를 배려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말엔 모순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내 15년 경력을 포기하는 것보다 그의 12년을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인지 배려를 베푸는 위치에 있었다.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건 나였다.


세시가 넘어서야 사태가 일단락됐다. 부랴부랴 조퇴할 준비를 하는 나에게 사장은 클라이언트의 중점 의뢰사항을 놓쳤으니 고과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번에도 성과등급은 B를 주겠단 소리였다.


신경은 남아나 있지 않았다. 팽팽해지다못해 이미 다 터져 너덜너덜해졌다. 사방이 꽉 막힌 벽이었다. 여기 치이고 저기 치여도 터뜨릴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거의 다 도착했는데 좌회전 신호가 너무 길었다. 불이 바뀌자마자 정신없이 차를 꺾었다. 유치원으로 들어가려면 한번 더 유턴을 해야 했다. 세시 오십분, 엄마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끝났어.」


얼굴 근육이 절망스럽게 이지러졌다. 핸들을 잡은 손에 벌겋게 힘이 들어갔다. 손과 팔뼈 사이가 텅 빈 것처럼 시큰거렸다. 너무 아파 한손으로만 유턴했다. 겨우 주차를 마쳤을 때, 차를 노려보는 딸아이의 얼굴은 시뻘겋게 얼룩져 있었다.


“엄마 필요 없어!”

“예솔아!”


딸아이는 울면서 걸어가버렸고 나는 그 뒤를 정신없는 여자처럼 따라갔다. 엄마가 뒤에서 따라오며 물었다.


“손목은 아직도 아픈 거야? 그러니까 진작에 병원 좀…….”

“지금 그게 중요해?


어디에도 터뜨릴 수 없는 화가 그쪽으로 터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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