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불러오는 물건들이 있다는 건 안다. 책 사이에 끼워둔 편지나 사진 같은 것들.
현오는 잇새로 쇳소리 같은 비속어를 내뱉었다. 그건 그 책을 다시 안 펴면 괜찮기라도 하지. 이건 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는 가슴을 무자비하게 헤집어대니.
이제 현오는 일상생활을 하기가 두려웠다. 꽉 찬 모래알 사이에도 얼마든지 공기가 존재할 수 있듯, 희진은 삶에서 사라졌지만 그녀와의 기억은 현오를 둘러싼 모든 것에 덕지덕지 끼었다.
과거는 명치를 얻어맞는 것처럼 세게 찾아온다. 일어나서 습관처럼 정수기 앞으로 향하는 중간에 갑자기, 업무 때문에 뒤적이던 명함들 중간에 갑자기, 좋아서 추가했지만 이제는 질린 그저 그런 음악들 리스트의 중간에 갑자기, 퍽. 차 안에선 완전히 무방비다. 플레이리스트에 문득문득 끼어 있는 그녀가 선곡한 음악들은 어김없이 현오를 뭉개버린다.
시동을 걸 때 블루투스가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을 끊어놓는다는 걸 매번 깜빡하고 기어를 ‘D’로 당긴다. 조금이라도 숨 돌릴 시간이 생기면 그녀가 떠오르기에 차에 타는 즉시 출발하는 것인데, 그 마음이 급해 꼭 더 큰 희생을 치르고 만다. 하루가 멀다하고 무너지다 보니 이제는 무너지는 소리가 그 음악소리와 같아진다. 사람이 음악과 함께 무너진다.
정신을 차리면 한강 다리를 다 건너와 있다. 마치 그녀가 있는 세상에 잠시 다녀온 것처럼 등이 흠뻑 젖는다. 현오는 그걸 음악 속에 다녀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음악은 문 같은 거였다. 그 안에 회전문처럼 갇혀 돌고 도는 문.
희진을 만나기 전 현오는 툭하면 ‘다음곡’ 버튼을 눌러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전주만 들어도 무슨 노래인지 알았고, 안다고 생각하면 3분간 그 노래를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에 곧장 빠져나오곤 했다. 한 마디로, 시간 낭비 하지 않았단 소리다.
그런데 처음 들어간 회사 앞 카페에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카페에는 종일 음악이 흘렀다. 현오는 한참이고 그 음악 속에 앉아있곤 했다. 바로 퇴근하지 않는데도 안 피곤했다.
“선곡이 참 좋네요.”
현오가 마침내 말을 걸었을 때 희진은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제목 알려드릴까요?”
“아니요. 이거 말고 더 좋은 게 있었는데 오늘은 안 나오네요.”
희진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플레이리스트를 훑는 모양이었다. 꼭 찾아주고 싶어하는 야무진 입술과 가녀린 손목을 다 못 덮는 아이보리색의 카디건이 잘 어울렸다.
“찾아드릴게요. 음이 어떻게 되죠?”
현오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 앞에서 음을 흥얼거리자니 멋쩍었고 사실 음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순간 현오는 여덟 개에 불과한 음들의 이런저런 조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다른 것이 좋아서인 건 아닐까 하는, 기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음 사이엔 뭐가 있단 말인가. 지나가는 음들의 사이에 집중해보려 하자 가슴속이 붕 떴다. 음과 음 사이를 느껴보려 노력하는 동안 저절로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됐다. 그 눈마주침의 순간 두 사람 사이에도 미묘함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감각이 되었다.
“이름 끝자를 딴 거군요. 카페 이름이.”
카운터 앞에 놓인 명함 한 장을 능청스럽게 집어 왔다. 그게 오로지 거래처로 점철됐던 현오의 일상 사이를 채웠다. 현오는 원래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 일어남과 살아감 사이를 채운 것 또한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녀를 만나 삶과 삶의 사이를 모조리 채운 현오였다. 그녀가 빠져나간 자리는 텅 비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리들이 현오를 무수히 괴롭혔다. 그 모든 것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