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패는 1승을 기쁘게 한다

좌충우돌 직관기(3)

by 도리

나의 팀 수원은 올해 시즌 개막 이후 3패, 승점 0점으로 리그 꼴찌를 달리고 있었다.

매주 졌다는 소식을 듣는 건 생각보다 답답했다. 그래도 개막전을 보고 실날같은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대감도 워낙 겨울 이적시장이 흉흉했기 때문인데, 도무지 아웃만 있고 이렇다할 영입이 없었다. 게다가 초짜 감독을 선임한 상태였기 때문에 팬들의 기대가 아주 낮았다. 개막전에 공개된 라인업은 신인 일색이었다. 신인 육성도 좋지만 그래도 프로 경기인데 대부분이 신인이라니. '와, 수원 진짜 힘든가보다.' 싶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작년에 서울이 그나마 강등권까지 먼저 다녀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이미 마음 속으로 최악의 수까지 바라봤기 때문일까. 어, 개막전의 경기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임생무퇴', 라인을 올려서 공격축구를 하겠다더니 정말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신반의했는데 진짜였다. 수원은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졌어도 대만족이었다! '강적' 울산을 대적해서도 물러서지 않고 밀어붙이는 모습은 골리앗을 상대하는 다윗 같기까지 했다. 처음 보는 골키퍼가 나왔는데 몸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막아주었다.(난 신인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노동건보다 더 나이가 많더라.) 게다가 새로 영입된 타가트가 골까지 넣었다! 앞으로의 수원이 기대되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울산이 잘 하긴 했다. 딱 봐도 날쌔고 몸도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울산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은 게 기뻤던 것이었다.

개막전 후 수원 인스타그램에 달린 댓글

그 날 수원의 SNS에는 악플이 없었다. 모두가 별 기대 않다가 의외로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리라. '이대로만 해 달라.'며 감독을 격려했다. 팬들은 영 힘들 줄 알았던 올 시즌을 그래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분홍빛은 바로 다음 경기에서 줄줄 깨졌다. 전북을 만나 홈에서 4:0로 참패했고, 올해 승격한 성남한테도 2:1로 패배했다.


3연패, 리그 순위는 어느 새 꼴찌가 되어 있었다. 라이벌인 서울은 무실점으로 1위까지 올라섰다. 이미 차이는 벌어진 것 아닐까, 우리는 계속 꼴찌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부진에 빠진 수원은 인천과의 홈 경기를 앞두고 SNS에 인천과의 홈경기 무패 전적을 강조하며 분위기 바꾸기에 나섰다. 정말 2009년 이후로 인천은 수원과의 홈경기에서 이기질 못했다더라. 하지만 나는 그 통계를 보고도 쉽사리 기대하지 못했다. 일말의 희망과 대부분의 좌절. 그래도 홈 경기를 보러 가는 게 축구팬이다. 나는 겨울처럼 추운 3월 31일, 롱패딩에 목도리를 돌돌 매고 수원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 하늘도 흐리고 너무 추웠다.

작년 11월을 마지막으로 가 보고 실로 오랜만에 가는 직관이었다. 많은 차와 사람들이 경기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망했다, 망했다' 해도 수원 팬은 많았다. 수원이 인구가 몇인데! 경기 시작도 전에 불타오르는 응원석을 보자 '꼭 오늘은 1승 했으면.' 하는 바람이 허파에 스며들었다.


경기에 앞서 조원희 선수의 은퇴식이 있었다.

매주 졌다는 사실은 1승을 간절하게 했다. 경기 내내 '제발 1승'을 바라는 마음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싸늘하게 찬 공기에 다리가 얼얼하게 느껴졌지만 중간에 나갈 수가 없었다. 사람이 간절하면 그렇게 된다.


전반 14분, 조금 일찍 염기훈의 PK로 골이 들어갔다. 1승이 눈앞에 보이자 자동으로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난 작년 아챔 4강 때 상처를 꽤 많이 받았는지, 우리가 골을 넣으면 몇 분 안 돼서 역전골을 먹힐까봐 마음이 안 놓였다. 역시나 6분 후에 역전골을 허용했다. 다시 기대가 짜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래, 패배가 아니라 무승부라도 얼마나 다행이야.


전반전은 1:1로 끝이 났다.

후반전, 수원 선수들은 계속해서 뛰었다. 감독도 이번 기회에 1승을 꼭 얻어가겠다는 각오였는지 익숙한 베테랑 선수들로만 구성했다. 수비도 나름 호수비였다. 예전의 수원 수비 같았으면 공을 거의 '무조건 뺏긴다' 싶을 정도였지만 오늘은 '무조건 뺏었다'. 하늘도 우리를 도우는 것 같았다. 인천의 날카로운 슈팅이 골대를 삑 빗맞고 나갔다. 인천에게는 정말 아쉬울 만한 기회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타가트가 골을 넣었다!


2:1,후반 18분이었다. 괜찮은 시간이다. 이번엔 진짜 1승이 눈앞에 보였다. 그냥 이대로 경기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90분의 정규시간이 다 가기만을 조마조마 기다렸다. 드디어 90분, 1승이다! 환호하고 있는데 웬걸, 추가시간에 신세계의 극적인 크로스와 타가트의 바짝 엎드린 헤딩으로 수원이 또 골을 넣은 게 아닌가!

한마음이었던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나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다. 2:1으로만 끝났어도 좋은데 3:1이라니!

수원의 2019 시즌 첫 승, 내 직관 첫 승

나를 들었다 놨다 한 첫 승의 환희는 실로 대단했다. 작년에 내가 수원 팬이 된 후로, 내 인생 직관 첫 승이기도 했다. 1년 반 만이었다. 내가 직접 본 경기 중에 승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작년 아챔 4강 때도 인생 첫 승을 볼 것 같아서 갔다가 역전의 상처만 받고 왔더랬다. (그런데도 내가 도대체 왜 축구에 빠졌는지 알 수가 없다.)

너무 기뻤다. 인생 첫 승, 시즌 첫 승은 나에게 그야말로 환희로 팡팡 날아오르는 기쁨을 주었다.


그 동안 승리가 없었던 게 이번 승리를 더 값지게 했다. 1:0일 때는 1골을 먹히면 화가 나지만, 0:1일 때는 1골을 넣으면 기쁘기 그지없다. 3연패를 했을 때는 1승이 진짜로 진짜로 기쁘다.

작년만 해도(수원이 4위였을 때) 인천과의 경기에서 이겼다는 것은 그리 큰 기쁨이 아니었겠지만 올해는 기쁜 일이 되었다. 수원이 상위스플릿에 겨우 남게 되자 그것만으로도 기뻤던 것처럼.


이런 걸 보면, 확실히 기쁨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조금 기쁜 일이라고 조금 기쁘고 많이 기쁜 일이라고 많이 기쁜 것이 아니다. 기쁨의 원인 자체는 똑같이 '1승'인데 앞에 붙는 말 '3패'가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직관 첫 승'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엄청난 경기가 되었다.


세상의 일도 그렇지 않을까, '그 일' 자체가 아니라 앞뒤로 붙는 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우리가 모든 일에 의미를 붙이며 살아가는 것이지, 그 일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갖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철학적인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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