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리그를 보는 이유
축알못의 축구팬 권하기(2)
'축구 잘 알아서 남자에게 매력있는 여자가 되자!'
예전엔 저런 표어가 통했다. 축구는 남자의 전유물이었고 여자가 축구를 좋아하면 '남자에게 매력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축구란 대부분 유럽 축구였다.
그 때는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을 보면 시대가 변하긴 한 모양이다. 지금은 '뜨악!' 하고 거부감이 드니까 말이다.
물론 내가 축구를 좋아하니까 남자친구가 좋아하기는 한다. 취미를 같이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신나는 일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는 공유자가 있는 것, 그래서 그걸 가지고 하루종일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 자체가 얼마나 엔돌핀이 도는 일인지 모른다. 그게 동반자라면 더더욱 인생이 즐겁겠지.
하지만 나와 그는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중이다. 그는 내가 EPL 팬이 되기를 바라고, 나는 매번 K리그 타령을 한다. 나는 틈만 나면 K리그 직관을 가자고 조른다. 착한 그는 많이 같이 가 줬다. 더 착한 나는 신혼여행을 런던과 바르셀로나로 가기로 했다. 해리포터 여행 반, 축구장 반씩 여행하기로 했다. 서로 수용 가능한 만큼 취미를 같이 즐기고 있다.
얼마 전 웨딩촬영을 마쳤다.나는 그와 만나는 4년 중 3년을 축구를 모르고 지냈다. 회사에서, 교회에서, 친구들과,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각종 모임을 만들어 축구를 하고 새벽에 일어나 축구경기를 챙겨보는 그를 보면서도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축구는 어디까지나 그의 취미였다.
출처: 연합뉴스그러다가 순전히 내가 신나서 축구팬이 되었다. 월드컵에서 조현우의 선방쇼를 보고. 그 빛현우가 우리나라 K리그 꼴찌팀 골키퍼라는 걸 알고 충격받아서. 이참에 남자친구는 나를 유럽축구로 점프시키려고 해 봤으나 나는 집요하게도 K리그 타령만 해댔다.
그가 유럽 선수의 동영상을 보여주면 나는
"K리그에도 이거 하는 선수 있어!" 한다.
그가 못 믿으면, 내가 영상을 찾아 보여준다. 물론 자세하게 들어가면 전혀 레벨이 다른 기술이겠지만, 내 눈엔 요래요래 비슷한 기술이다. 그는 내 안목에 빵 터지며 웃는다.
"그래, 비슷하긴 하네."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다른' 축구 얘기를 한다.
그가 하도 좋아하니 관심이 갈 법도 한데, 나는 EPL은 별로 재미가 없다. 보다가 잔다.(새벽이라 그런가.) 난 확실히 K리그가 더 재미있다. 나같은 축알못 여자라면 K리그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그린 유럽 선수들..유럽 축구는 선수들이 다 초면인 것 같고 얼굴도 잘 안 외워진다. 인터뷰는 외국말이라 도무지 정이 들지가 않는다. 우리 언어로 뉘앙스까지 파악할 수 있고 SNS에서 우리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 K리그의 인물들에게 더 정이 간다. '아이돌 팬질'을 해 본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우리는 아이돌이 엄청 잘 생겨서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캠 같은 것들을 보며 평범함과 친근함에 '정이 들어' 팬이 된다. 그리고 그의 꿈을 응원하며 기꺼이 돈을 쓴다!
유럽 선수가 무슨 기술을 하면 '우와~' 하고 끝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상대의 압박을 이겨내는 걸 보면 '히야~' 하며 대견하다고 눈물을 훔치는 것이다.(나다.)
어제는 U-20 월드컵 4강전이 있었고, 몇 시간 더 전에는 한국과 이란의 A매치가 있었다. 한국 축구의 유망주로 평가받던 백승호가 오랜 기다림 끝에 선발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본인도 기뻤겠지만, SNS에서 친구에게 백승호의 선발 소식을 공유하며 '자기가 눈물난다는' 팬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좋아하는 선수의 꿈을 자신의 일처럼 응원하는 것이다.
빅버드의 응원석이미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는 그런 수요를 파고들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 실력이 아주 뛰어난 가수보다도 '슈퍼스타K' 나 '프로듀스' 같은 오디션 프로를 통해 데뷔한 가수가 더 흥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들의 꿈을 응원하면서 본인도 좋은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향평준화된 지금, 사람들 모두가 뛰어난 기술 자체에 열광하지는 않는다. 기술이 조금 떨어져도 그게 멋이라며 소비할 정도로 다양화된 시대이다. 취향은 다양한 것이다. 감정과 애착에 대한 수요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게 새로운 취향으로 인정받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축구를 좋아하지만, 특히 이 점에 대해 꼭 한 번 말해보고 싶었다. 선수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 우리가 재미를 직접 느끼고 그들의 노력을 응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난 K리그가 더 재미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인물을 응원하고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들을 지켜보다 보면 내 일상도 더 활기차진다. 나는 K리그를 따뜻하고 또 따뜻하게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유럽축구라는 선택지가 있는데 K리그 보는 거, 그게 축구 보는 수준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거 잘못됐다. 축구를 좋아하는데 K리그가 취향인 거지. 이 취향 존중해줘야 한다. 나는 누굴 위해서도 아니고 내 삶을 재미있게 살려고 축구를 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