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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e Y Nov 20. 2023

고3 엄마는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올해도 수능이 다가왔고 지나갔다.

대한민국 수능 세대라면 누구나 그럴 듯, 수능 날만 되면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여섯 살을 키우는 엄마 정도의 나이가 되면 가까운 지인 중 수능 보는 친구들이 많지 않은데도 이상스럽다. 그만큼 20년 전 그날이 우리, 수능 세대에게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다. 


매년 11월 둘째 주 목요일은 온 세상이 꽁꽁 얼었다. 무슨 법칙 같았다. 

"올해 수능은 예년보다 안 춥네?"라는 말이 매번 나오는 것 보면, 어쩌면 수험생과 수험생 가족이 느끼는 온도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유의 밝음으로 내성적인 성격이 그리 드러나지 않은 고3 학생이었던 것 같다. 인생이 어느 길로 갈지 결정되는 그날을 맞이하는 게 두려웠던 건지, 학교 앞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주목받는 게 부끄러웠던 건지, 혼자 마음을 다스리고 조용히 대단원을 열고 싶었던 건지 새벽 5시에 학교 문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시험 직전,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마음 다스리기는 실패했다. 바보인가.)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꽤나 잘했기에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모였다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렇다고 특목고는 아니고요, 저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귀 밑 3cm 머리 길이를 늘 유지해야 한다. 월요일 아침마다 담임 선생님은 자를 대고 검사했다. 3cm가 넘으면 바로 학교 앞 미용실에서 자르고 와야 했다. 전교생이 11시 정도였나 밤늦게까지 야자를 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전교 30등까지는 따로 모여 야자를 하는 우월반도 있었다. 모의고사 때마다 우월반 구성은 바뀌었다. 나도 기적적으로 들어가 본 적은 있으나 거기까지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 친구들이 몇 있었고 치마를 타이트하게 입는 친구도 드물게 있었지만 그녀들도 공부에 진심이었다. 사립재단으로 '무늬만 외고'라 불리던 한 학교(실고에서 외고로 바뀐 학교로, 지금은 정말 찐 외고가 되었다)와 우리 학교, 이렇게 두 학교가 붙어 있었고 교문을 함께 썼다. 무늬 외고는 남녀공학임에도 그쪽 남자친구들은 귀 밑 3cm, 펑퍼짐한 치마 속 체육복을 입고 다니는 우리 학교 여학생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뭐, 우리도 피차일반이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살아도 상위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내신이 잘 나오지 않는 학교라는 이유도 한 몫했다고 말하고 싶다. <어머니, 사교육을 줄이셔야 합니다>의 저자, 정승익 선생님은 '공부는 결국 고통스럽다. 그러니 누가 시키는 게 아닌 스스로 하고자 하는 공부를 해야 지속할 수 있다'라고 했다. 고등학교 무리에 있을 때 공부는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해야 하는 의무고 삶의 전부였을 뿐이다. 그게 바로 정승익 선생님이 말하는 진정한 공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소위 말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대학교에 가지 못한 게 함정일 뿐. 어쨌거나 이러한 고등학교에서는 매일 새벽, 밤 하루 두 번 진풍경이 펼쳐진다. 매일 새벽 6시가 되면 대형 스쿨버스 몇 대가 들어온다. 고등학교에서 스쿨버스라. 고등학생 때 내 삶은 이러했다. 새벽 5시 20분에 집 앞에서 스쿨버스를 탄다. 8시 이전까지 자습을 하고 이후 수업을 듣고 6시에 수업을 마치면 우리의 낭만적인 야자가 시작된다. 몇몇은 한쪽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한다. 어느 날은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함께 까만 밤하늘에 동그랗게 뜬 달을 일제히 바라본 적도 있었다. 괴롭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가히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11시가 되면 부모들의 차가 하나둘씩 들어와 운동장을 가득 메워 헤드라이터의 빛나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귀가 후 바로 집 앞 독서실로 간다. 새벽 1시 30분쯤 되면 중학생이었던 동생을 불러 김밥천국에서 짬뽕라면을 먹고 들어간다. (그때까지 중학생도 공부를 한 건가.) 토요일도 마찬가지다. 밤늦게까지는 아니지만 점심때 친구들과 학교에서 피자를 시켜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늘 하루를 조금 일찍 시작한다.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의 김유진 변호사의 하루 시작 시간과 동일하다. 삶은 많이 다르지만. 돌아보면 내가 하루를 이렇게 시작할 수 있었던 습관은 고등학생 때의 루틴 덕분이었던 것 같다. 어떤 반항 없이 서당개처럼 3년을 사니 부모가 보기에 얼마나 가여웠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즐겨 찾는 몇몇 유투버 분의 자녀들이 수능을 앞두고 있었다. 수능에 앞서 올라온 영상을 보니 교육에 베테랑인 그들에게도 수능을 앞둔 긴장감과 자녀에 대한 안쓰러움, 이 시기를 잘 견뎌온 자랑스러움이 절절히 느껴졌다. 20년 전, 나는 수능을 보는 당사자였기에 내 심정만 생각했을 뿐, 3년 동안 함께 고생해 준 엄마를 헤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 수능 날 당일 아침은 기타 시간이었다. (매주 1회 기타를 배운다. 우리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칭한다.) 기타 선생님들은 나보다 열 살 내외로 위고, 자녀들은 유치원생에서 중학생까지다. 그중 초등학생을 자녀로 둔 선생님이 말하길, "우리 딸이 나중에 수능 안 본다고 하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만큼 수능 날이 떨린다는 뜻이다. 우린 모두 수능을 본 지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말이다. 수능장에 아이를 보낸 엄마들을 얼마나 더할까 싶다. 


고등학생 때 엄마를 카레이서라고 놀렸다. 우리 자매를 태우고 학교로도 달렸고 어디든 달렸다. 나는 매일 아침 유치원 등원을 위해 운전을 하고 종종 하원 후 일정을 위해 또 달린다. 가끔 시간을 촉박하게 맞춰야 할 때면 아슬아슬한 카레이서가 되곤 한다. 이제야 엄마가 얼마나 마음 조리며 도로를 누볐는지 알겠다. 엄마가 도로를 스케이트장 마냥 누비지 않게 조금만 부지런 떨어주면 좋겠는데 아이도 타인인지라 엄마 마음은 눈곱만큼도 알아주지 않는다. 


수능을 처리하고 대학교만 가면 인생에 꽃길이 펼쳐지는 줄 알았다. 사실 '인생'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본 적도 없던 것 같다. 우리 엄마도 수능 날까지만 잘 키우고 대학교를 보내면 마음고생 한 스푼을 덜었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모두 평균적으로 건강했을법한 나이였으니 배우자 건강에 문제라든가, 수능을 봤던 딸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더 큰 일을 겪기 전까지는. 여러 일을 겪으면서 부모의 심장은 늙어가고 있다. 잔잔한 물결 같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지진 나듯 쿵쾅거리는 순간을 몇 차례 만났다. 그 고요한 첫 시작이 수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수능은 수험생에게도, 수험생의 부모에게도 새로운 문을 여는 행위였나 보다. 이 문을 넘으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공식적으로 고등학생 기간은 사회 전체가 안쓰러워하는 존재이기에 우리만 힘들고 고생하는 줄 알았다. 우리 집 여섯 살 아이는 학습에 압박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익히고 재미를 느낀다. 사실은 아이에게 그런 하루를 만들어주고자 엄마는 체력 후 달리게 노력한다. 우리 딸은 집에서 한글 공부를 하거나 여타 다른 친구들처럼 문제집을 푸는 시간을 보내지도 않는다. 그저 놀면서 자란다. 그런데 사실 엄마는 놀면서 배우고 자라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매일 밤 10시에 '그림책 읽는 법', '아이와 함께 하부르타 하는 법' 강의를 듣고 육아책, 교육 책을 틈틈이 읽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는다. '아이는 스스로 자란다'는 말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말이다.


소위 말하는 서연고중경외시 어쩌고 저쩌고 대학에 들어가진 못 했지만 단 한 번도 눈길 돌리지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또, 인생 통틀어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건 사실 나 혼자만의 노력이 아닐 것이다. 자식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부모의 숨은 노력, 눈물, 기쁨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제야 말하지만, 고등학생 아이를 둘이나 키워내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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