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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e Y Nov 07. 2023

취향을 알아간다는 것

자발적으로는 절대 택하지 않았을 장르의 책들과 씨름하면서 자기의 취향을 발견하게 된다.그간 내륙 지방에 고립되어 있어서 몰랐는데 20년 만에 바다에 나가보니 내가 물과 친하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나를 열어두고 나를 실험하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사실 결혼할 때 집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난 그런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사랑만으로 결혼한 게 아닌가 싶다. 보통 남자가 집을 해오고 여자가 안을 채운다던데 요즘도 그런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거저 얻는 물질은 차세대 여성 리더인 나란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꿈꾸지도 않았다. 쓰고나니 부끄럽다. 재테크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오늘날 현실에 빗대면 나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부터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가고 고등학생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를 갔고 대학은 서울 끝까지 통학을 했으며 매일 주야장천 2호선을 뺑뺑 돌며 온서울을 돌아다녔으니 집과 활동 장소 사이 거리에 대한 개념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하철에서 책을 읽거나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메모를 하거나 골똘히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그러니 결혼할 때도 신혼집에 큰 관심은 없었다. 시간이 금이라는 진리를 알지 못했다. 그저 결혼 준비로 배운 게 있다면, 우리가 가진 돈으로 살만한 집이 서울은 말해 뭐해 수도권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다 둘이 살기엔 넉넉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18평 아파트를 전세로 구했다. 정확히는 엄마가 찾아서 구해주고 우린 부동산에 가서 사인하고 돈만 냈다. 역시 엄마의 걱정과 발품 덕에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최고의 위치와 포근함을 자랑했다. 당시엔 남구로로 출퇴근했기에 서울도 그다지 멀지 않았고 앞으로 나가면 좋아하는 스타벅스가 사방에 널렸고 대기업 백화점 두 군데, 대형마트 두 군데, 어디든 갈 수 있는 버스터미널, 지하철 7호선까지 위치는 완벽했다. 그때 우리가 집을 사지 않은 게 잘못인지 월세로라도 서울에 입성하지 않은 게 잘못인지. 부질없지만 우스갯소리로 처음 신혼집에 들어갔을 땐, 부모님과 살고 있는 내 방 하나 보다 집 전체가 작게 느껴져서 놀랐다. 아마 우리 남편은 내 방보다 작다는 내 말에 놀랐겠지만.


우리는 18평 신혼집에서 서로 요리를 해주며 주말도 보내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업도 해보고 어느새 예쁜 딸도 함께했다. 딸의 돌잔치 답례품을 준비하다가 온 집안에 발 디딜 곳 없던 적도 있었다. 여전히 부자가 되지 못한 건 그때도 지금도 내 삶이 부끄럽지 않아서일까. 아담한 집에서 가정을 꾸렸던 그 시절 모두가 내게는 아름답게만 포장되어 마음 한편 추억으로 남았다. 한 차례 집주인이 바뀐 후 우리는 하루 사이에 쫓겨날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제주도 사람이었던 집주인은 제주도에서는 다들 그런다며 당장 내일 집을 빼라고 했다. 말도 안 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허구한 날 야근 인생이었던 남편은 부재고, 임신 살도 빠지지 않은 채 갓난쟁이 아이와 단둘이 남겨진 내가 대한민국 아줌마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억척스러워진 건 아마 그때부터였겠다.


그렇게 또 우리는 친정 부모님의 지원을 조금 더해 지금의 집을 사고 잘 살고 있다. (당시엔 사업하다 그만뒀기에 정말 막막했고 전세 대출과 매매 대출을 따졌을 때 금액이 거의 엇비슷했다.) 여전히 집 값 치솟았을 때 팔지 못했고 이 집에 대한 애착이 가득해, 부자 되기 물살에 합류하지 못하는 기분이다. 우리 집에 산지는 3년이 조금 지났다. 18평보다는 살짝 여유로운 공간이 생긴 후, 나는 '개인 취향'이라는 것에 눈을 떴다. 신혼 때는 가구도, 가전도, 식기도 모두 엄마의 의견을 반영했다. 아니, 거의 그렇게 했다. 딱히 디자인이나 기능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때 중요한 건 신혼집 안에 들일 물건이 아니라 커리어였다. (그래서 신혼 가구와 가전 금액은 삼 십평 빰쳤다.) 그런데 내 집을 갖고 공간을 채우고 또 공간을 비우고 하면서 취향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취향이란, 한 번 정해져서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 상황이나 세월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보다 더 중요한 건, 취향을 안다는 건 나를 알아간다는 것. 취향이 변했다는 것 또한 변해가는 나를 세심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취향을 선택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존중해 준다는 의미다. 


매일 새로운 취향을 찾고 느끼는 건 행복한 일이다. 취향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조금 더 열렸다. 그런 아이들이 있다. 세네 살 꼬맹이인데 계단을 올라가 서랍에서 원하는 옷을 꺼내 입는 아이들, 한 여름에 털 달린 엘사 드레스를 입고 등원하는 아이들, 한 겨울에 구멍 숭숭 뚫려 발가락 다 보이는 샌들을 신고 나가는 아이들, 매장에 가도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하게 집어내는 아이들. 우리 딸이다. 대부분 어른들은 이해 못 하고 부모를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그 또한 아이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딸이 원하는 것을 느끼고 직접 선택하고 자신의 취향을 알아 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계절감이 없거나 장소에 맞지 않는 의상을 선택할 땐 부모의 가이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옆에서 보통의 TPO를 말해주기만 하면 본인이 스스로 느낄 터이다. 지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비록 신혼 때는 엄마의 입바람을 많이 탔으나, 나 또한 그리 자랐던 것 같다. 큰 어른인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지만 엄마는 눈치 보지 않게 나의 취향을 존중해 줬다. 언제나 내 공간을 꾸민다며 온 구석에 샤프, 지우개, 단추 등을 실로 묶어 거미줄을 쳐놓았지만 엄마는 칭찬해줬다. 


이렇듯 내 아이도 성인이 되면서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고 기쁨을 맛보길 바라지만, 엄마와 아빠를 향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이 큰 일을 겪은 후 엄마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무 큰 상심에 빠져 어두운 방에 갇히면 스스로 나오지 않는 이상 가족의 존재도 도움되지 않을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이후 조금 나아지셨지만 그래도 예전만치 '재미'를 느끼는 순간을 찾기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남들에겐 여행이 새로운 도전이나 일상에서의 탈출이라고 다가오지만 본인에겐 그저 장소만 바뀌고 기대하지 않는 또 하나의 하루일 뿐이다. 과거에 해본 경험이라도 지금 하면 새롭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그마저 이미 젊었을 때 다 해본 일이라며 작은 도전조차 거부해 버린다.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쉬운 일이 어떤 이에게는 시도 자체가 너무나 어렵거나 원하지 않는 귀찮음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도 작은 취향을 찾길 바란다. 취향은 너무나도 개인적이고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에, 내가 좋다고 남에게 추천하거나 친절하게 눈앞에 보여줘도 나의 느낌만큼이나 타인에게 강렬할 수 없다. 그렇다고 취향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다. 얼마 전 나는 주말에 남편과 아이와 공원을 산책하다가 '우리 지역 기업'을 소개하는 부스를 만났다. 그곳에서 친환경 수세미와 주방 세제를 저렴하게 가져왔고 이후 다소 먼 곳까지 계속 찾아가며 같은 가게에서 같은 제품을 꾸준히 쓰고 있다. 단순히 친환경 수세미와 코코넛 주방세제가 기름 떼도 잘 닦이고 거품도 잘 나고 향기도 매우 좋아서 재구매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학교 때 3D 마야 수업에서 내가 낸 3D 과제 결과물은 화장실, 주방도구였다. 그때 교수님이 내 취향을 알려주셨다.


  "주희는 위생용품을 정말 좋아하는 가보구나." 


단순히 지나가는 말인데, 그렇다. 나는 위생에 관한 생활용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후 소비재사에서 PR 경력을 쌓았던 이력들이 오늘의 취향 리스트와 하나의 점으로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의 취향은 내 삶의 역사와 연결되고 스스로를 아끼고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주방 세제가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동생과 엄마에게도 선물했다. 아직까지 피드백이 없는 걸 보니 역시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거다. 


도서관 글쓰기 수업에서 어떤 예순 넘어 보이는 할머니를 만났다. 자식들을 모두 키워놓고 은퇴 후 글쓰기 모임도 주최하고 시에서 운영하는 시민 기자로도 활동하고 계신단다. 내 취향 중 하나도 글쓰기이기에 엄마가 글쓰기를 하면서 위안을 얻길, 응원을 받길 바랐다. 하루는 백화점 중국집에서 엄마와 점심을 먹으며 글쓰기가 얼마나 좋은지, 엄마에게 왜 추천하는지, 처음에는 어떻게 접근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열렬하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그저 자신의 취향이 확고한 딸을 자랑스러워하며 육아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시민 기자 할머니와 이야기 나누며, 계속 손 놓지 않고 취향을 찾아가려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고 엄마 곁에서 계속 응원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친한 친구였던, 가장 지혜로웠던 우리 엄마가 곧 취향을 찾아 작은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자랑할 거라고. 어린 시절 내가 망설이고 흔들릴 때마다 용기 한 스푼 건네어 스스로 일어나고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엄마를 기억하며. 오늘의 글이 오늘의 엄마에게 용기 한 스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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