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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Dec 02. 2024

어리버리 대리님은 회장님의 며느리

스탠 냄비와 프라이팬을 제조해서 판매하는 중소 브랜드 하나를 상당 기간 전담하여 방송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유통을 함에 있어서 홈쇼핑이 메인 판로였던 브랜드사는 홈쇼핑 영업팀을 따로 크게 두고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수는 적어도 곤란한 일은 번개같이 해결해 주시는 차장님, 상냥하고 일처리가 완벽한 과장님과 업무적으로는 조금 미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만 늘 쾌활한 모습을 보이는 대리님으로 구성된 브랜드사 홈쇼핑영업팀은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조합이었습니다.


상품도 가격적으로, 구성적으로 괜찮아서 방송을 하면 늘 만족스러울 정도의 매출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습니다. 방송만 끝나면 한껏 더 좋아지는 분위기에 MD도 저도 은근히 이 브랜드의 방송을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PD님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공장에서 이 냄비랑 프라이팬 만들어서 S 로고나 W 로고 찍으면 명품 냄비가 되고요. 저희 브랜드 찍으면 그냥 흔한 중소 브랜드 냄비 되는 거예요. 괜히 비싼 돈 주고 명품 냄비 사지 마세요!"


방송 리뷰 때면 더 발랄해져서 업계의 비밀(?)도 털어놓는 대리님의 모습도 재미있었고 단 한건의 불만 접수도 없도록 포장부터 배송까지 꼼꼼히 체크하는 과장님도 든든했습니다.


어느 날 과장님의 흔치 않은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우리 00 대리가 이제 온전히 본인 업무를 좀 해봐야 해서요. 저희가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좀 걱정이 되는 런칭 상품 하나를 책임지고 진행해 보게 되었어요. 일단 MD님께는 계속 호흡을 맞춘 PD님을 어떻게든 배정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려놓기는 했는데.. 계속 보셔서 아시지만 00 대리가 착하고 밝고 다 좋은데 아직 일처리가 완벽하지 못해서.. 잘 좀 부탁드립니다"


MD의 요청에 팀장님은 흔쾌히 저를 방송에 배정해 줬고 대리님과 대망의 런칭 방송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냄비 브랜드가.. 벨기에 회사 브랜드고요.. 어... 음 유럽 30개국에서 꽤 유명한 브랜드예요. 회장님이 저변을 넓혀보자고 하셔서 좀 긴급하게 계약을 맺고 진행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지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거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평소 밝던 분위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그냥 던진 정보확인용 질문에도 주눅이 든 대리님은 회의 시간 내내 긴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일단  시청자들이 유럽 브랜드를 선호하시기도 하고 실제 유럽에서는 인지도가 좀 있는 브랜드라고 하시니 심의팀 증빙만 완료되면 최대한 유럽과 벨기에 느낌을 많이 살려보시지요. 유럽 매장 사진이나 영상 있으시면 최대한 확보해 주시고요. 회사나 브랜드 정보 최대한 긁어서 주시면 내부에서 브랜드 영상도 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나름 최선의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요청을 드리고 내부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필요한 자료들이 충분히 확보가 되었고 브랜드 영상도 예상보다 잘 나왔습니다. 그리고 브랜드사의 큰 결단으로 꽤 고가의 추가 구성이 함께 제공되기로 했습니다.


런칭 방송 전날 밤 또다시 과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준비 열심히 해주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회장님도 00 대리가 보고를 해서 준비 상황은 다 파악하셨고 최대한 매출에 도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라고 하셨어요" 


과장님도 살짝 긴장한 기색이 느껴져 저는 괜한 농담을 던졌습니다.


"회사가 굉장히 수평적이네요. 저도 대리지만 저희 회사 회장님 눈도 못 쳐다보는데 거기는 회장님이 일개 대리 보고를 직접 받으시네요. 저도 그런 기회 있으면 진짜 광 잘 팔 수 있는데"


과장님은 제 말을 듣고 한참을 웃으시더니 말을 이어갔습니다.


"PD님. MD이 말을 안 해줬나 보네요. 00 대리는 회장님 아드님의 와이프 즉 회장님의 며느리에요. 회장님이 며느리도 일 배워보라고 현장에 배치하신 거고요. 늘 허물없이 대하시길래 그런 색안경 없는 멋진 분인줄 알았는데 모르셨던 거군요?"

"네?? 회장님 며느리요??"


저에게는 늦은 밤 잠이 확 달아날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고 그제야 대리님의 설명하기 어려운, 조금은 여유로운 행동들이 생각나며 혼자 기억의 조각을 열심히 맞췄습니다.


다음날 스튜디오에서 대리님에게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데 대리님 안색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PD님 저 긴장해 가지고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제가 처음으로 진행해 보는 프로젝트인데.. 매출이 안 나오면 어쩌죠?"

"해외 브랜드 라이선스 상품들 중에서는 드물게 해외 자료들도 많고 구성도 괜찮은 컨디션이에요. 유럽이랑 벨기에 이야기 많이 하면 큰 문제없을 거예요. 믿어보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방송이 시작되었고 미리 준비한 시각자료들이 차례로 나가고 유럽풍의 요리들을 조리하는 모습들을 선보이자 주문이 거침없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40분 정도 지나자 방송 종료 때쯤 목표 매출이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걱정 어린 표정의 대리님이 떠오르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MD로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이번 방송 물량을 아주 타이트하게 넣어뒀어요. 지금 시스템 상 남은 재고로 보이는 게 전부예요. 이렇게 판매될 거라고 미처 예상을 못해서 추가로 물량 넣을 게 없어요. 차라리 지금부터 매진이 예상된다고 알리고 고객 불만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때부터 방송은 매진이 예상된다는 멘트와 함께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매진 예상이라는 말에 더욱 자극이 된 시청자들의 주문은 빨라졌고 방송 시간을 채우기도 전에 정말 매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방송 후 스튜디오에서 샘플을 정리하던 대리님은 저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번개 같이 달려와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제가 알던 대리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제가 처음 맡은 건데 매진이라니 믿기지가 않아요!! 감사합니다!!"


업무 지원차 방문한 과장님 역시 예상 못한 결과라며 놀라워했습니다.


방송을 진행했던 쇼호스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대리님이 급히 저희를 막았습니다.


"혹시 두 분 시간 괜찮으세요? 저희 회장님이 고생 많으셨다고 여기 앞에서 식사나 하자고 직접 오셨어요"


그렇게 MD와 쇼호스트 그리고 저는 대리님과 함께 회사 앞 식당으로 가서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회장님은 반갑게 손을 내밀며 저희의 노고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회장님이 대화를 주도하고 대리님이 분위기를 만들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회장님이 갑작스레 다른 주제를 꺼냈습니다.


"홈쇼핑 사업이 허가제죠?"

"네 기존 회사들은 몇 년마다 한 번씩 심사를 받고 사업권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왠 뜬금없는 소리일까 궁금해하는데 회장님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내가 자본도 모을 수 있고 연줄도 좀 있어요. 최근에 홈쇼핑 회사를 늘린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네 저도 두세 개 정도 홈쇼핑 회사가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업계 소식은 들었습니다"

"언제까지 남한테 맡겨서 장사를 할 수는 없으니.. 직접 홈쇼핑 회사를 만들어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방송 쪽을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사업이 돌아갈 텐데"

"그러게요. 홈쇼핑 업계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순간 대리님과 쇼호스트가 양쪽에서 옆구리를 찔러서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식사는 무난하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회장님과 대리님이 차를 타고 떠난 뒤 쇼호스트는 다시 한번 내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어휴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회장님이 대놓고 스카웃 제의한 건데 그렇게 건성건성 대답을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나는 나도 오라고 할 줄 알고 설레었네!"

"그런 뜻인지 몰랐어요.."


브랜드사에서 야심 차게 런칭했던 그 스텐 냄비세트는 놀랍게도 10년이 지난 지금도 홈쇼핑에서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첫 프로젝트 성공 이후 더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대리님은 어느 날부터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더니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홈쇼핑 영업팀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이지만 회장님의 며느리분과 일을 해보고 회장님으로부터 (쇼호스트피셜)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것은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즐거운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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