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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Dec 16. 2024

전 여친을 파트너사 직원으로 만나면 벌어지는 일

대학 시절 제가 전공했던 신문방송학과는 꽤나 실용적이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내 많은 학생들이 이중전공으로 신문방송학과를 택했고 한정된 수강 인원으로 인해 매 학기 전공 수업 수강 신청을 위한 전쟁이 치러졌습니다.


간신히 인기 있는 전공 수업 수강 신청에 성공한 저는 첫 수업을 위해 조금 일찍 강의장에 도착했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노트도 꺼내고 필기구도 꺼내고 나름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자리가 절반 가까이 비어 있음에도 앉지 않고 강의실 입구 주변을 불안하게 서성이는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은 탓에 본의 아니게 자꾸 제 앞을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을 분산시키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지정석 아닌데 아무 데나 앉으셔도 됩니다"


"아 그게 아니라.. 제가 디자인과인데요.. 이중전공으로 이 수업을 꼭 들어야 하는데 수강 신청을 실패해서요"


너는 실패했지만 나는 성공했지 류의 묘한 승리감도 들면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전공 수업을 어떻게든 들어보겠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교수님 스타일을 아는데요. 일단 오늘 철판 깔고 수업 들으시고 이따가 교수님 사무실 따로 찾아가셔서 오늘 수업 내용이랑 왜 꼭 수업을 듣고 싶으신지 어필해 보세요. 아마 개인적으로 티오를 만들어주실 거예요"


"네.. 감사합니다"


그 여학생은 다행히 제 말을 믿었고 실제 교수님의 사무실을 따로 찾아가서 추가 수강 신청에 성공했습니다.


두 번째 수업 시간에 그녀는 작은 초콜릿을 내밀며 저에게 감사표시를 했습니다.


"꼭 들어야 했고 듣고 싶기도 했는데.. 덕분에 수강 신청 성공했어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이 수업 팀플 수업인데 혼자 들으시면 누구랑 팀 하실 거예요? 저희 팀에 한 명이 부족한데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럼 너무 감사하죠..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그녀는 우리 팀플까지 함께하게 되었고 예전 글에 조교와 영상을 찍은 팀원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전 글: 명문대 수석도 별거 아니구나 https://brunch.co.kr/@munhaksoyear/150 )


그렇게 저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연인으로 발전을 했지만 풋풋한 그 시절의 사랑이 그러하듯 사소하고 유치한 이유로 이별을 했습니다.


그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후에도 그녀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회사 선배와 커피 한 잔을 하고 회사 로비로 들어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출입문 앞에 가까이 서있는 바람에 거의 부딪힐뻔해서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비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녀가 서있었습니다.


최소 5년 만의 만남.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만남. 

마음속은 놀라고 혼란스럽고 엉망이었지만 의외로 말은 담담하게 나왔습니다.


"음?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녀의 얼굴에 잠시 황당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도 대답을 했습니다.


"오랜만이네. 나 여기 회의가 있어서"


"그래? 나는 여기 다니고 있거든. 무슨 회의하는데?"


"00 브랜드 운동화 방송 하려고. 내가 메인 담당은 아닌데 사수 따라왔어"


여기서 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그 브랜드는 제가 전담하고 있던 브랜드였고 그녀가 말하는 그 회의는 제가 주관하는 회의였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꽤나 집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몇 년 만에 만난 것도 신기한데 이렇게 같은 회의실에서 같은 일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 PD님 들으셨어요?"


"네?"


"이번에 오프라인 팝업 진행하는 00랑 00은 방송 중 강조를 하시면 안 됩니다. 매장이랑 온라인 영업이랑 또 묘한 관계도 있어서요"


"아... 네"


"PD님. 오늘따라 좀 집중을 못하시고 00 대리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은데  혹시 관심 있으세요?"


브랜드사 차장님이 회의에 집중 못하는 나에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아.. 아니요. 제 스타일이 아니셔서"


그 순간 회의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저희의 사정을 모르는 분들에게는 제 말이 위트 있는 답변처럼 느껴진 모양입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저는 잠시 그녀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공원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오빠. 얼굴 두꺼운 건 여전하네. 나는 아까 감정변화도 없이 오랜만이네 할 때 무슨 어제도 만난 사이인 줄"


"진짜 놀랐는데 이상하게 말은 침착하게 나오더라고. 근데 네가 00 브랜드사에서 일하는 건 진짜 처음 알았네. 아나운서 한다더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뭐. 학원에 돈만 썼지"


예전부터 알던 사람과 회사 일을 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들으라는 듯 브랜드사 차장님에게 뼈 있는 농담도 하고 그녀 역시 지지 않고 MD에게 저를 도발하는 멘트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차장님. 이 제품 사진 모델이 진짜 00 대리님이세요? 아니 모델을 쓰시지 왜 아마추어를.."


"아 이 친구가 나름 사장님 마음에 들어서 저희 옷 브랜드 모델도 하고 있어요. 물론 자사몰에만 사진이 올라가지만요 하하"


"MD님. 제가 홈쇼핑은 처음인데 PD님들 자료 요청이 원래 이렇게 많으신가요? 방송에 잘 안 쓸 것 같은 자료도 너무 요청을 하셔서요"


"네? 아.. 방송에는 또 어떤 게 고객들한테 어필이 될지 모르니까 저희가 좀 다양하게 자료를 준비하기는 합니다. 특히 PD님은 좀 더 열정이 있는 분이라 양해를 좀 부탁드릴게요. 근데 두 분 초면이신데 케미가 진짜 좋아요. 정 드시겠어요 허허"


업무적인 연락은 개인적인 연락으로 발전해서 서로 시시콜콜한 사담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로 저녁에 시간을 내어 식사를 하기도 하며 한동안은 예전 우리의 흑역사를 스스럼없이 말하며 서로 박장대소할 만큼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모 일간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는 선배가 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너 팟캐스트 진행도 한다며? 내가 이번에 직장인 주제로 팟캐스트 하나 제작을 하려고 하는데 진행자로 좀 도와주라"


"진행자요? 제가 팟캐스트 꽤 오래 하기는 했지만 전문 진행자는 아닌데 괜찮으세요?"


"그래서 보조 진행자로 통통 튀는 여성 한 명이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


"제 지인 중에 아나운서 지망했던 친구가 하나 있어요. 저랑 케미도 잘 맞고"


"그래? 좋지. 일단 한번 같이 보자"


그렇게 선배와 저희는 같이 모여 팟캐스트 방송을 기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배가 녹음과 편집을 그리고 제가 기획과 진행을, 그녀가 보조 진행을 맡아 대망의 첫 화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무난하게 녹음은 진행되었고 이야기는 직장 선후배 간 논쟁이 있는 주제로 흘러갔습니다.


"네 다음은 직장 선후배 간 관계 문제인데요. 이게 참 영원한 이슈예요. 그렇죠?"


"맞아요. 저도 선배 하나 때문에 너무 힘든 상황이라 너무 공감이 갑니다"


"근데 또 무조건 선배 문제만은 아닐 텐데 한번 양쪽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좀 더 권력이 있는 선배들이 고쳐야 할 점이 많죠"


정답이 없는 주제를 두고 저희는 각자의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목소리는 높아지고 선배가 녹음을 끊고 저희를 말릴 정도로 과열되었습니다.


아마 이때 저희 둘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우연히 다시 만나 잠시 즐거웠지만 우리가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 왜 결국 우리가 서로를 놓았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고요.


팟캐스트 프로젝트는 취소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희는 다시 급격하게 소원해졌습니다. 

개인적인 연락이 없어지고 업무적인 연락도 회사 메일을 통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잡힌 회의날 그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00 대리가 사장님 직속 조직으로 발령이 나서 이제 홈쇼핑 영업팀 일을 안 하게 되었어요. PD님이랑 티키타카가 좋았는데 아쉽네요"


브랜드사 차장님의 너스레에 저는 말없이 쓴웃음만 지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다시 한번 만난 인연이었던 만큼 우리는 서로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그만큼 더 빠르게 퇴장했습니다. 서로 미련이 있거나 붙잡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회사의 파트너사 직원으로 옛 연인을 우연히 만나는 건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현실에서도 가능했습니다.


현실이기에 드라마처럼 하필 서로의 사이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서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다가 다시 재결합하는 그런 결말은 없었다는 것이 차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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