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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Dec 30. 2024

끈끈한 동료애로 뭉친 줄 알았는데

"어머니가 연세가 어떻게 되시니?"


"이제 50대가 좀 넘으셨죠?"


"그러면 어머니 생각한다 셈 치고 이거 방송 준비 좀 해봐"


어느 날 팀장님이 무심하게 상품 설명서 하나를 내밀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갱년기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기능상품이었습니다.


"백수오라고.. 나도 잘 모르는데 아무튼 갱년기 여성에게 좋은거래. 공부 좀 해봐"


"알겠습니다"


백수오의 효능부터 경쟁사 유사 상품의 방송까지 살펴보며 상품에 대해 대략 파악을 하고 있는데 담당 MD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지금 경쟁사에서는 백수오 상품 매출이 슬슬 올라오고 있어요. 저희가 빨리 대응을 해야 해서 급하게 파트너사를 구했고요. 이 회사에서 방송에 차별화를 두고 싶다고 중견 탤런트 000님을 섭외하시겠대요"


드라마에서 꽤 자주 보던 분을 방송으로 직접 만난다니 신기했습니다. MD는 최대한 빠르게 방송을 해야 한다며 서둘러 준비를 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 뒤 MD의 공언대로 편성팀에서 편성 확정 소식을 알려왔고 저는 바로 회의를 잡았습니다.


이름이 생소한 파트너사 상무님과 중견 탤런트, MD 그리고 저는 회의실에 둘러앉아 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PD님. 저희 백수오 상품은 제주에서 재배한 백수오를 추출해서 만듭니다. 다른 백수오 상품과는 그 밀도나 효과가 남다릅니다"


파트너사 상무님의 열성적인 설명이 마음을 흔들었고 경쟁사 대비 우수한 가격 경쟁력도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PD님. 제가 연기만 해봤지 홈쇼핑은 처음이라.. 잘 좀 부탁드려요"


수십 년간 드라마에서 활약한 중견 탤런트 000님은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하게 회의에 임했습니다.


제주도 세트로 싱그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중견 탤런트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홈쇼핑 방송의 호흡과 멘트 등을 꾸준히 알려드리며 익숙해질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첫선을 보인 백수오 방송은 한마디로 대박이 났습니다. 미처 다들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준비한 물량이 전부 판매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경쟁사들이 선점한 시장에서 후발주자로서 성공했다는 점이 많은 관계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MD는 빨리 일주일에 몇 번씩 방송을 더 잡아보겠다고 신이 났고 파트너사 상무님도 담당 프로젝트의 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홈쇼핑 진출이라는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긴장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중견 탤런트분도 그제야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우리 PD님이 하드 트레이닝을 해줘서 저 진짜 쇼호스트 된 거 같아요 오호호호"


그렇게 저희는 환상의 콤비가 되었습니다. 

MD는 지겹도록 편성을 따왔고 파트너사는 끊임없이 물량을 생산했습니다.


중견 탤런트분도 성공에 고무되어 제가 하는 방송 요청 사항에 대해 단 한 번도 난색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주 시청자에게 익숙한 탤런트가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상품은 날개 단 듯 잘 팔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우리 PD님을 드라마 PD보다 자주 보네요 호호"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방송을 하며 중견 탤런트분은 저와의 업무가 익숙해졌는지 농담도 많이 하고 한결 편해진 모습을 보였고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필요한 멘트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파트너사 상무님 역시 방송에 필요한 소품이나 손판넬 등을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트렌드에 맞게 척척 바꿔서 준비해 왔습니다.


방송이 얼마나 자리를 잘 잡았는지 생방송 중간중간 농담을 하고 사담을 해도 구매 속도가 꺾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랑 지금 같이 방송을 하는 PD님이 총각이에요. 근데 태도도 싹싹하고 일도 잘하는 것 같아. 우리 딸 소개해주고 싶다니까 진짜?"


"어머! 미모로 인터넷에서 난리난 그 따님이요?? PD님! 미래의 장모님이랑 방송하고 있는 거네요?"


PD 동료들 역시 저에게 좋은 상품 잘 잡았다며 부러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실무까지 꼼꼼하게 처리하는 파트너사 상무님도 너무 감사했고 시청자들에게 나날이 더 어필하는 중견 탤런트분도 감사했습니다.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넘어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해 방송이 없는 날에도 서로 안부를 묻고 방송 전략을 핑계로 만나 차를 마시고는 했습니다. 

상무님은 추가로 준비하고 있는 상품이 있다며 꼭 같이 하자는 말을 했고 중견 탤런트분도 지금 여기저기 홈쇼핑에서 러브콜 받고 있다며 여기만큼 호흡이 안 맞을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의 작은 노력으로 주변분들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 저를 기쁘고 기분 좋게 하는건 없었습니다. 저도 출근 준비를 하면서 회사 갈 생각 웃음을 못 참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마침 갱년기에 있던 엄마에게도 이 상품을 권했습니다. 갱년기를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방송을 하며  쌓인 지식을 뽐내며 왜 갱년기에 백수오가 필요한지에 대해 열띠게 말했습니다.  가뜩이나 건강기능식품이라면 질색을 하던 엄마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만 먹어 보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몇 주후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거 백수오인가.. 이거 상당히 괜찮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건강기능식품을 잘 먹지도 않고 그 효능에 대해서도 늘 부정적인 의견을 내던 엄마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자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파트너사 상무님께 이 이야기를 하자 상무님은 생생한 고객의 후기라며 엄마에게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한 세트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파트너사와 백수오라는 상품은 저에게 이제 신뢰라는 뜻의 또 다른 표현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느 날 느지막이 출근을 해서 방송 배정표를 보고 있는데 주말에 편성되어 있었던 백수오 방송이 빠져있었습니다. 이상해서 MD에게 전화를 해보니 통화 중이었고 파트너사 상무님은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었습니다.

한동안 상황 파악을 해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팀장님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급히 뛰어왔습니다.


"큰일 났다. 소보원에서 보도 자료를 냈어"


팀장님이 내민 종이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시중 유통 중인 백수오 제품 상당수가 가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MD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혼이 나간 듯 보이는 MD가 절 보더니 겨우 말을 이어갔습니다.


"PD님 죄송한데 지금 고객 문의가 너무 많아서요. 이걸 먼저 좀 처리해야 해서.. 이따가 얘기하시죠"

"파트너사 상무님 연락은 안 되나요?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던데"

".. 지금 파트너사 연락 되는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도 상황 파악 중이에요.."


시중의 백수오 건강기능식품들이 백수오가 아닌 외관이 유사한, 식용이 금지된 이엽우피소를 원료로 생산이 되었다는 소보원의  보도자료는 홈쇼핑 전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홈쇼핑사에서 백수오 관련 방송이 모두 취소된 것은 물론 기존 구매한 고객들에게 보상 목적 사이트를 긴급하게 오픈하는 등 계엄령에 준하는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한동안 고객들의 컴플레인에 대응하고 보상 체계를 마련하고 편성을 급하게 조정하는 등 홈쇼핑 전체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사태 이후 늘 핸드폰 전원이 꺼져있던 상무님은 밤늦은 시간 짧게 죄송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얼굴마담으로 활약했던 중견 탤런트 분은 파트너사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끈끈한 동료애로 뭉쳤던 저희는 모래알처럼 흩어졌습니다.


사태를 수습하는데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해당 파트너사의 이름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중견 탤런트분은 다시는 홈쇼핑 업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아침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당시 백수오 방송을 함께 진행했던 쇼호스트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이야기를 지나간 추억처럼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쇼호스트는 씁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명이랑 얼굴을 노출하고 방송을 했잖니.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마트에서 장 보다가도 항의받고 세탁소 갔다가도 욕먹고 그랬지. 그때는 진짜 죽고 싶더라. 진짜 파트너사한테 물어보고 싶더라고. 우리한테 왜 그랬냐고, 말해보라고"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경제적인 이유든 다른 이유든 백수오 원산지를 바꿔야 할 상황이었다면  왜 우리에게 숨겼을까.


제주도산 백수오가 아니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상품의 포인트가 있지 않았을까.


그걸 같이 고민하고 새로운 컨셉으로 방송을 했으면 어땠을까.


몇 년 전 가짜 백수오 사태가 결국 사실이 아닌 해프닝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런 아쉬움은 더욱 커졌습니다.


어쩌면 비즈니스 관계를 뛰어넘은 동료라는 생각을 저만 한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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