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파트너사 과장님이 새롭게 홈쇼핑 방송 업무를 맡을 직원이라며 한 명을 소개했습니다.
앳된 얼굴이라 가볍게 농담을 했습니다.
"직원분이 되게 동안이시네요. 20대 초반 같아 보이시는데"
과장님은 크게 웃으면 말했습니다.
"최 주임이 실제로 20대 초반이에요. PD님이랑 띠동갑일걸요? 저희가 정부 지원금 받으려고 고졸 사원들을 일부 채용했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실례했습니다"
최주임님은 머쓱하게 웃는 저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PD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꽤 큰 키에 탄탄한 체격 그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인상 좋아 보인다는 말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느 날 해당 상품 방송 준비를 하던 중 심의팀 직원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PD님 방송 표현 중 420개가 넘는 고객들의 후기라는 내용이 있는데 어디서 확인이 가능한가요? 몰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
"그게 자사몰에서 판매하고 받은 후기인데 따로 후기 기능이 없어서 법인 CS 업무용 폰으로 고객들이 보내온 후기를 기준으로 작성했어요"
"그럼 실제 후기를 캡처한 이미지로 모두 증빙해 주셔야 방송 때 420개가 넘는 후기라는 표현 사용 가능하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때그때 고객들이 폰으로 전송한,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리뷰를 방송 때 활용하려는게 저의 과한 욕심이긴 했습니다. 최 주임님과 방송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툭 나왔습니다.
"주임님. 이번에 후기는 노출이 힘들겠어요. 후기 증빙이 요즘 빡빡해져서.. 참 후기도 많고 실제 좋은 후기들이 많아서 판매에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PD님. 혹시 어떻게 하면 증빙이 가능할까요?"
낙담하기는커녕 초롱초롱한 눈으로 방법을 묻는 주임님의 말에 놀라며 저도 모르게 그 방법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최 주임님에게 다음날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PD님. 심의팀에서 요청하시는 형태로 모두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확인을 해보니 후기가 100개 정도 더 있더라고요. 총 500개가 좀 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좋은 내용이나 포토 후기 같은 건 따로 정리해서 PD님 보실 수 있게 준비를 해뒀어요"
"이렇게 빨리요?"
"어제 잠도 안 오고 야근을 조금 했습니다. 덕분에 생생한 고객들의 후기 보면서 회사뽕도 차올랐고요"
전혀 피곤한 기색 없는 목소리에 일처리가 빠른가 보다 했는데 이후 밤샘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송은 고객의 생생한 후기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더 좋은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일을 같이 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주임님이 참 성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방송을 위해 회사로 들어가고 있는데 방송 준비를 위해 일찍 회사에 방문한 주임님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인사를 하려는 찰나 주임님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웠습니다. 누군가 버린 일회용 종이컵이었습니다. 주임님은 익숙한 듯 그것을 휴지통에 넣고 스튜디오로 사라졌습니다.
이때부터였습니다. 뭔가 이 사람은 다르다고 느낀 것이.
저는 그 이후 유심히 주임님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임님은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방송 관계자뿐만이 아니라 스튜디오 보안 직원분들, 청소하시는 분들에게까지 항상 먼저 밝게 인사를 했습니다.
또 주임님은 부지런했습니다. 필요한 업무를 요청하면 항상 데드라인 훨씬 전에 마무리를 했습니다.방송 중에도 가장 바삐 움직이며 필요한 업무를 찾아다녔습니다.
주임님은 다른 파트너사와 공유하는 소품실이나 방송 준비실이 난장판이면 늘 혼자 각까지 맞춰가며 정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임님만 다녀가면 소품실과 방송 대기실은 늘 깨끗했습니다.
한번은 파트너사 직원분들과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업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어떤 쇼호스트 멘트가 별로네, 사장님이 어떠네, 경쟁사가 양아치네 등등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져 저를 포함한 모두가 깔깔대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놀랍게도 주임님은 그런 대화에는 일절 끼지 않았습니다. 딴 곳을 보거나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상의 이야기나 업무 이야기가 나오면 진행자 마냥 대화를 주도했습니다.
어느 날 방송을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가는데 주임님이 스튜디오 청소 여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다른 일을 하는 척하며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 아니 그래서 나는 여기 직원이신줄 알았지"
"방송 때문에 제 회사보다 자주 오기는 하는 것 같네요"
"늘 보면 참 인상도 좋고 성실하신 것 같아. 몇 살이세요?"
"네 22살입니다. 사회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나이도 어린데 참 착해. 스튜디오 쓰는 것도 보면 다른 파트너사는 테이프 쓰레기며 종이며 다 버려두고 가는데 총각은 먼지 하나 없이 다 청소해 두고 가고"
"저희 방송 때문에 생긴 건데 가져가지는 못해도 쓰레기통에 넣는 거야 뭐 쉽죠"
"우리 딸내미가 이번에 대학 들어가거든. 혹시 만나볼 생각 없을랑가?"
그때 뭔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묘한 질투도 느껴졌습니다.
이기주의에 가까운 개인주의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관계를 두고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계산적으로 따지는 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가끔은 손해보며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혹시 철저하게 계산된 보여주기식 행동은 아닐까?
그날 방송이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모든 분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가려는 주임님께 말했습니다.
"주임님. 저에게 잠깐만 시간을 내주세요"
"네? 지금요?"
"꼭 물어보고 싶은게 있습니다"
평소와 너무 다른 제 모습에 주임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스쳐지나갔습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