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방송에 늘 쇼호스트만 나와서 진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브랜드사의 직원분들이 게스트로 함께 나와 상품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에서 쇼호스트와 호흡을 맞춰 방송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어떤 브랜드사는 홈쇼핑 방송 전문 게스트를 채용해 전 홈쇼핑 방송에 소위 말해 돌리기도 합니다. 쇼호스트 못지않은 발군의 진행 능력을 가진 게스트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온갖 식재료를 손쉽게 요리로 만들어주는 주방가전이 홈쇼핑에 혜성 같이 등장해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홈쇼핑사를 불문하고 요일,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방송이 잡히는 바람에 틀면 나온다고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붙은 상품이었습니다.
제가 한동안 이 상품을 전담해서 방송할 때의 일입니다. 인기가 많은 상품이었고 홈쇼핑사들이 경쟁해서 방송을 하려고 구애를 하던 시절이라 브랜드사의 기세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늘 회의에 참석하던 브랜드사 부장님은 지난 방송의 멘트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 늘 타 홈쇼핑사와의 비교를 서슴지 않아서 MD도 쇼호스트도 이 상품의 방송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름 이 상품 방송을 즐겼는데 바로 실력도 인품도 훌륭한 브랜드사의 게스트분 때문이었습니다. 늘 웃으며 회사 누구를 보더라도 먼저 밝게 인사를 하고 방송의 주인은 쇼호스트라며 욕심내지 않고 쇼호스트와의 호흡을 누구보다 중요시 여기던 게스트였습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스탭들이 인정할 만큼 방송 실력도 뛰어났습니다. 쇼호스트의 멘트 실수를 티 안 나게 정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떨 때는 쇼호스트보다 방송의 컨셉과 흐름을 더 잘 이해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지 않게 리드했습니다.
방송이 끝나면 항상 진지한 얼굴로 저에게 본인 방송의 개선점은 없는지 꽤 긴 시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PD님. 오늘 제 멘트가 전반적으로 좀 길지는 않았나요? 고객분들 최근 후기가 있길래 멘트로 좀 녹여 보려고 했는데 욕심이 과했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매번 똑같은 내용 반복하는 것보다 새로운 내용을 조금씩 추가하는 게 좋죠. 다만 후기 내용을 혼자 다 말하시면 힘드시니까 다음에는 쇼호스트랑 번갈아가면서 소개하면 어때요? 서로 리액션도 해줄 수 있고"
"너무 좋아요!!"
게스트분은 꿈이 있었습니다. 브랜드사 게스트가 아닌 정식 쇼호스트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실제 쇼호스트들의 방송도 열심히 모니터링하고 본인 방송을 할 때마다 성장하겠다는 노력이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인재가 실제 쇼호스트가 되어서 고객들에게 좋은 상품을 소개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저 역시 현직자의 입장에서 많은 정보와 더불어 각 홈쇼핑사 채용 일정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하고 면접 전략까지 함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방송 전 잠시 비는 시간에 사무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다 문득 그녀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게스트 대기실을 찾았습니다.
"게스트님. 커피 드시고 텐션 올려서 오늘 방송도 대박 내봐요"
"PD님!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커피를 지금 마실 수가 없어요.."
"커피 엄청 좋아하시잖아요? 어디 아프세요?"
"아 사실은 제가 임신을 해서.."
"와 축하드려요! 그럼 이제 엄청 조심하셔야겠네요. 안 그래도 방송 스케줄도 빡빡하신데"
해당 상품의 인기가 날로 치솟자 전 홈쇼핑사에서 방송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게스트분 혼자 다 감당이 안되어서 예비 게스트 한분이 추가로 투입된 상황이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출연 빈도가 적어지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방송에 대한 이야기, 쇼호스트 준비에 대한 이야기, 임신에 관련된 이야기 등 시간이 부족할 만큼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출산하시러 들어가면 방송 누가 하나요? 제가 볼 때 게스트님만큼 하는 대체자가 없을 것 같은데"
"에이 벌써 다른 게스트들이 자리 잡고 있던데요 뭐"
"근데 요즘 얼굴이 되게 창백하세요"
"입덧이 좀 심해져서 그런가 봐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늘 씩씩하게 방송을 하고 밝게 인사하며 돌아가던 분에게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이른 아침 방송, 저녁 늦은 시간 방송에 집중적으로 투입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임신하셨는데 이렇게 밤늦게 일을 하셔도 되나요? 이거 근로법인가 뭔가 위반 아닌가"
"제가 출산 전에 일 많이 하고 싶어서 자원한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게스트분은 말과 달리 점점 힘에 부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방송 도중 눈에 보일만큼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제가 다른 회사 일에, 게스트분 일정에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요? 낮시간 방송도 많은데 왜 굳이 이른 아침이랑 늦은 밤 방송에만 오시는 거예요?"
저의 질문에 한참 머뭇거리던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모 홈쇼핑 쇼호스트 공채에 지원을 해서 면접을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거기 인사팀장님이랑 저희 회사 임원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여서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대표님도 배신감 느낀다고 노발대발하시고 하셔서.. 제가 자원한건 아니고 회사차원에서 약간 징계처럼 이런 시간에만 저를 넣어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임산부를 이런 시간에 일 시키는 게 맞아요?? 당장 신고하세요"
"저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라.. 괜찮습니다. 슬슬 안정기에 들어서고 있기도 하고요"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쓸데없는 오지랖이 될 것 같아서 저도 말을 그만두었습니다.
결국 사고는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른 아침 방송이 있던 날. 새벽같이 나온 게스트분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오늘 멘트 최대한 줄이고 제품 시연정도만 하시면 어떨까요?"
"네 감사합니다 PD님... 요즘 허리도 많이 아프고 불면증도 생기고 조금 몸이 안 좋네요. 얼른 출산 휴가 갔다가 건강히 복귀해야겠어요!"
평소보다 눈에 띄게 힘이 없어 보였지만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방송 준비를 위해 부조정실로 향했습니다.
방송 스탭들과 방송 관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스튜디오에 있던 FD 감독이 인터컴을 통해 말했습니다.
"PD님. 게스트분이 할 말이 있으시다고 해서 마이크 열어드릴게요"
"네 게스트님. 무슨 일이세요?"
"PD님. 죄송합니다...."
게스트분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스튜디오 상황을 알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FD 감독이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했습니다.
"PD님! 게스트분이 쓰러지셨어요!! 어떻게 해요!!"
저는 미친 듯이 스튜디오로 달려가며 119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기 00 홈쇼핑 본사 1층 스튜디오인데요. 임산부가 쓰러졌어요. 구급차 부탁드립니다. 빨리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스탭들이 게스트분을 둘러싸고 있었고 쇼호스트가 그녀를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PD님 방송 시작 20분도 안 남았는데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곧 구급차 올 거예요. 방송은 걱정 마시고 병원부터 다녀오세요"
들것에 실려가는 와중에도 방송 걱정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고 제 회사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업무를 시킨 브랜드사에 화도 났습니다.
방송은 쇼호스트 단독 진행으로 문제없이 끝났습니다.
방송이 끝난 후 브랜드사의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아침부터 고생 많으셨습니다. 00이가 방송 펑크 냈다는 소식 듣고 전화드렸어요. 이것 참 이래저래 민폐 끼쳤네요. 이래서 임산부를 직원으로 쓰기 참 까다롭.."
"부장님. 00님 최근에 계속 새벽이랑 밤 업무를 하신 건데 임산부 입장에서 정상적인 스케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회사 직원이 아닌 제가 봐도 계속 몸 상태가 안 좋은 게 느껴졌고요. 저희 회사에도 00님 출연 시간 등 기록이 다 남아있습니다. 오지랖 같지만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부당성에 대해 제가 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 아닙니다. 저희가 잘 조치하겠습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저희도 잘 모르기는 해요. 하하"
부장님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서둘러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 낮시간 방송에 투입되어 더 열심히 방송에 임했습니다. 본인의 남산 같은 배를 활용해 상품의 특성과 매력을 부각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출산 휴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그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해당 상품의 매출이 썰물 같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원인이 그녀의 부재에 있지는 않겠지만 속으로 조금 통쾌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는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노동조합이나 노무사분들과 대화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지식을 쌓게 되었습니다.
아쉽게 쇼호스트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녀는 지금도 종종 다양한 상품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