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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Dec 09. 2024

아내 앞에서 남에게 선뜻 허리 숙일 용기

저는 홈쇼핑 방송 매출이 잘 나오면  그건 PD의 예술적인 연출도, 쇼호스트의 현란한 멘트도, MD의 기가 막힌 판매 조건 세팅도 아닌, 무조건 상품이 훌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매출이 좋았던 방송 진행 이후에는 브랜드사 대표님이나 직원분들께 좋은 상품 덕에 손쉽게 매출 올린 PD 되었다며 깊은 감사의 표시를 꼭 합니다.


어느 날 인테리어 상품 담당 MD가 연락이 왔습니다.


"PD님. 곧 인테리어 상품 하나 방송을 할 건데요. 이 대표님이 저희랑 패션 잡화로 오래 거래한 대표님이긴 하세요. 그런데 요즘 사정이 너무 안 좋으셔서.. 이번에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인테리어 상품을 가지고 오셨어요. 그런데 이런 류 상품이 홈쇼핑 역사 통틀어도 잘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걱정이 많이 되네요"


다행히 상품 회의 때 대표님은 꽤나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상품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건 물론이고 대학 후배들이었다던, 같이 온 직원들과 격 없이 대화하는 모습에 저도 왠지 즐거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PD님. 이번 상품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서 준비해 보겠습니다"


힘든 소리 한번 없이 비즈니스 이야기를 끝마치고 일어서려던 대표님에게 제가 불쑥 말했습니다.


"대표님. 백화점 쪽 아는 분 있으세요?"

"네. 제가 이런 사업 한두해 한 게 아니라 유통 쪽 연줄을 기가 막힙니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인테리어 상품류 구매하시는 분들은 김치 사듯이 구매 판단을 안 하실 것 같아서요. 방송 전에 고객 반응도 볼 겸 백화점 팝업 스토어라도 간단히 진행 가능하세요? 판매가 된다면 추가 매출도 되는 거니까요"

"네 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던 말을 지키듯 대표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하고 떠났습니다.


다음날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PD님! 서울은 아니지만 경기도권 백화점 두 곳에 다음 달 입점하기로 했어요. 이왕 입점하는 거 기존 패션 잡화랑 보유하고 있는 다른 인테리어 소품들 같이 진열해 두고 판매해 보겠습니다"


생각보다 빠른 진행에 저도 더 의욕이 생겼습니다.


"대표님. 그럼 매장 오픈 하시면 제가 촬영 한번 가도록 할게요. 백화점 브랜드라는 것이 꽤 크게 다가올 것 같아서 방송에 적극 활용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오픈날 촬영까지 무사히 마치고 열심히 방송 준비를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PD님. 전혀 예상 못했는데 실제 백화점에서 판매가 꽤 되고 있어요"


대표님의 밝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요? 너무 잘 되었습니다. 판매하시는 것도 좋지만 고객이 물어보는 것이나 반응 같은 것도 꼭 저에게 전달 주세요"

"그리고 MD님한테 너무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요. 일정 수준 이상 백화점 매출이 발생했기 때문에 방송 때 백화점 입점 브랜드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네요"


홈쇼핑 방송에서 백화점 언급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호재였습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맞물려서 첫 방송은 예상치 못한 매진을 기록했고 그 매진 이력을 무기로 다음 방송에 대박이 나는 등 해당 브랜드사의 인테리어 상품은 해당 시즌 홈쇼핑 최고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대표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올 한 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별말씀을요. 상품이 좋아서 많은 분들이 알아봐 주신 덕분이죠"

"사실 직원들 월급도 못줄 신세였다가.. 이번 시즌에만 10억 벌었습니다.  PD님이 주신 여러 아이디어들이 너무 큰 힘이 되었어요"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은 그 이후로도 마치 제가 은인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종종 안부 연락은 물론이고 방송을 같이 하는 날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여러 이야기를 쏟아내었습니다.


"PD님. 제 아내가 기자인데 진짜 괜찮은 기자들이 많아서요. 이렇게 솔로이신 게 아까워요.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PD님. 제가 연줄 통해 들은 소식인데요. 홈쇼핑 회사가 2개 더 생긴대요. 혹시 이직 생각 있으시면 저한테 이야기해 주세요"

"PD님. 크리스마스라 회사 앞 빵집에 케이크 하나 맡겨놨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맛있게 드세요"


딱 부담스럽기 직전까지 대표님은 저에게 잘해주셨고 그 인연은 몇 년 이상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제가 퇴사를 결정한 다음날 대표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PD님. 퇴사하신다면서 저한테 말씀도 없으시고 너무 서운합니다. 저희가 함께한 게 몇 년인데 제가 식사라도 한번 대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대표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약속을 잡았고 대표님은 평소 단골이라며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을 예약했습니다.


약속 당일 대표님은 아내분과 함께 나오셨고 웨이터분과 사담을 나눌 만큼 친분을 보이며 익숙하게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식사는 정말 맛있었고 아내분 역시 기자 출신답게 어색함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남편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망해가는 회사 살려주신 장본인이시라고.. 저도 감사드립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세요. 제가 회사 하나 살리고 말고 할 능력은 없습니다. 다 대표님 상품이 좋고 해서 잘 된 거겠지요"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표님은 예전보다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서울 중심지 고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회사를 하나 더 차리는 등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별장이며 명품 등등 제가 아는, 그리고 좋아하는 분의 성공 이야기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덧 아쉽지만 자리를 마무리할 때가 왔습니다.


"대표님. 오늘 정말 잘 먹고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는 지하철을 타야 해서 이제 가보겠습니다"

"제가 지하철역까지만 그러면 모셔드릴게요"


대표님의 으리으리한 외제차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도착한 저는 다시 인사를 하고 내렸습니다.


"대표님. 태워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연락드릴게요"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대표님이 급히 내려 제 앞으로 뛰어왔습니다.


"PD님. 몇 년간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강남 한복판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대표님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나이는 물론이고 사회적 위치나 성공 수준에서 비교도 안 되는 일개 홈쇼핑 PD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가 보는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할 수 있는 용기에 적잖이 놀랬습니다.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사업가의 성공할 수밖에 없는 대범함과 자신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겸손을 느꼈습니다.


대표님은 지금도 여전히 노련하게 사업을 운영하며 한 번씩 연락을 주십니다. 이번 분기에는 어떤 일이 잘 되었는지 등등 숨 가쁘게 전해주는 소식에 옛날 생각이나 웃음도 많이 나지만 제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꼼짝도 않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대표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살면서 가끔 사소한 일에 자존심이 꿈틀거릴 때마다 대표님의 그 모습을 생각하며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저도 언젠가 진심으로 감사한 분에게 그 마음을 담아 허리 숙여 인사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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