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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Nov 25. 2024

시크하고 도도한 대리님의 비밀

조금은 갑작스럽게 수산물 관련 지방 현장 방송이 잡혔습니다.


홈쇼핑 방송은 철저히 스튜디오 중심이기 때문에 현장 방송은 준비할 것도 많고 신경 써야 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굉장히 관심을 가지는 방송입니다.


철저한 준비를 위해 다소 준비 시간을 두고 확정이 되던 평상시와 달리 급하게 편성된 탓에 배정을 받은 다음 날 바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현장으로 향하는 5시간 동안 사전에 체크해야 할 것들을 미리 챙기고 협조 요청을 해야 할 부분들을 정리하며 협력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차장님. 제가 1시 정도에 터미널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회사 주소 공유해 주시면 택시 타고 이동할게요"

"PD님 먼 길인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하네요! 저희 직원이 터미널에 나가 있을 겁니다. 같이 오시면 됩니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해서 굳은 몸을 풀고 있으니 차가운 인상의 젊은 여성분이 아는 체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PD님? 김 00 대리라고 합니다. 오늘 오신다고 해서 모시러 왔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실까요?"


대리님이 안내하는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출발했습니다.


늘 그렇듯 생산 현장은 긴박하고 날 것에 가깝게 돌아가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방송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그나마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만하면서도 현장감을 살릴 수 있는 귀한 장소를 찾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회사 사무실부터 수산물 저장창고, 바다 위 조업장까지 돌아보니 벌써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와 함께 이동하며 열심히 설명을 해주신 차장님이 연신 악수를 청하며 제게 말했습니다.


"PD님. 멀리 오셨는데 오늘 여기저기 보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저녁 드셔야죠? 여기가 바다 앞이라 해산물들이 아주 끝내줍니다"

"제가 급하게 내려오느라 아직 숙소도 못 정해서요. 시간 늦었는데 저 신경 쓰지 마시고 퇴근하세요. 저녁 제가 알아서 해결하고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좀 피곤하기도 했고 모처럼 바다도 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기에 차장님께 완곡하게 거절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숙소를 아직이요? 김양아! PD님 숙소도 아직 없는데 이러면 안 되지! 얼른 안내해 드려라"


차장님의 말에 터미널에서 만났던 대리님이 굳은 표정으로 얼른 다가와 저를 끌었습니다.


회사를 나와 잠시 걷다가 제가 대리님께 말했습니다.


"제가 미리 몇 군데 리스트는 해두어서요. 그냥 제일 깨끗해 보이는 곳을 갈 거라서 안내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그리고 저희가 같이 숙소 왔다 갔다 하면 그것도 좀 이상하잖아요? 내일 연락드릴게요.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여기 주변에서는 00텔이 가장 깨끗하고 좋습니다. 거기 한번 알아보세요" 


시내 가는 택시를 타고 대리님이 추천해 준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추천받은 숙소답게 깨끗하고 저렴해서 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샤워를 하고 바다를 보러 갈 채비를 막 마쳤는데 차장님의 전화가 왔습니다.


"PD님., 이렇게 가시면 너무 서운합니다. 가볍게 밥이라도 드시고 주무세요. 이러면 저희가 너무 면목이 없어요"

"차장님 어차피 내일 아침에 인사드리고 갈 텐데요 뭘. 모닝커피나 한잔 하시죠"


몇 번을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저는 식당 주소를 받아 들고 툴툴 거리며 숙소를 나섰습니다.


차장님이 알려준 작은 횟집 앞에는 대리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싱싱한 회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언제 오세요? 빠르게 먹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방을 둘러보며 제가 말을 하자 대리님이 주저하면서 답을 했습니다.


"다들 오늘 야근이 있으셔서.. 못 오실 것 같아요"


이럴 거면 왜 사람 오라 가라 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준비해 주신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자리에 앉았습니다.


천성이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이왕 식사하는 김에 대리님께 회사나 수산물에 대해 쉴 새 없이 물어봤습니다.

만난 처음부터 냉정하고 감정 변화 없는 표정을 유지하던 대리님은 본인의 아는 분야가 나오자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며 때로는 방송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대리님 처음 뵈었을 때는 엄청 시크해 보이고 그랬는데 지금은 되게 적극적이고 활기차 보이세요"

"제가 낯을 좀 가리기도 하고 회사분들이나 문화가 조금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저도 모르게 계속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는 다들 제가 차갑고 딱딱한 줄 아실 거예요. PD님도 아시죠? 약간 차가운데 도도한 비서 같은 이미지?"


너무나 당당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뭐라고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간 뒤라 조금은 편해졌는지 대리님의 말수가 눈에 띄게 많아졌고 전 연인 이야기부터 운동 이야기까지 별별 이야기를 다하며 저의 호응을 유도했습니다.


게다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흥이 났는지 저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얼근하게 취하기도 했습니다.


"대리님. 저 이제 너무 피곤해서 가야 할 것 같아요"

"네네 PD님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댁이 어디세요? 택시 타실 거죠? 저는 숙소가 가까워서 걸어서 가도 되어서요"

"PD님!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계속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저도 여기 사는 건 아니고 이럴 때마다 출장을 오는 거라서요! 아 짜증나!!!"


처음과 다르게 몹시 톤이 올라간 대리님은 휘청거리며 무작정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오늘 주무시고 가시는 거예요? 숙소가 어디세요? 택시 잡아드릴게요"

"아까 PD님께 안내해 드린 그 숙소가 제가 매번 이용하는 숙소예요!! 빨리 가요! 추워요!!"


깜깜한 바닷가 앞 도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저희는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늦은 밤 젊은 남녀가 술에 취해 같이 숙소로 들어가는 모습은 딱 오해받기 좋은 그림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저희는 숙소의 좁은 입구 앞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PD님 몇 호세요?"

"저 304호요"

"이런 씁..저 305호네요"

"..."

"..."

"인간적으로 코 골지 맙시다"

"이 촌동네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싶으세요?"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고 저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꽤 길었던 일정 탓인지 간단하게 씻은 저는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대리님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습니다.


'PD님. 제가 어제 좀 과하게 가벼운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분들에게는 별다른 말씀 말아주세요. 그냥 쭉 이런 캐릭터로 회사에서는 지내고 싶어서요'


실제 현장 방송이 진행되던 날도 대리님은 특유의 심드렁하고 시크한 표정으로 준비 과정부터 방송까지 함께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현장 방송은 예상한 매출 몇 배를 뛰어넘는 성과를 이루었고 협력사의 임원분들까지 허둥지둥 현장으로 출동할 만큼 큰 소식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협력사의 강력한 요청으로 회식 자리가 잡혔습니다. 고생한 방송 스탭분들부터 협력사 직원분들까지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며 서로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문득 구석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만 먹는 대리님과 눈이 마주쳤고 저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때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대리님은 가늘게 눈을 뜨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이미 실룩거리는 제 입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저는  웃음을 꾹 참고 차장님께 말했습니다.


"차장님. 이번에 대리님이 진짜 고생하신 것 같은데 일을 같이 해보니까 엄청 시크하시고 딱딱하신 스타일 같아요. 약간 차갑고 도도한 비서 같은 느낌?"


일순간 모두의 시선이 뜨악한 표정의 대리님에게 쏠렸고 차장님은 크게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PD님! 김 대리 저거 사실 컨셉이에요. 속으시면 안 됩니다. 쟤 회사 옥상에서 소리도 지르고요. 회사 계단에서 벽도 치고요. 본인은 안 들린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 친구들이나 부모님한테 전화하는 거 들어보면 감정의 화신이 따로 없어요. 다들 재미있어서 그냥 모른체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조용한 캐릭터로 남고 싶다던 대리님의 말이 귀에 맴돌아서 폭소가 터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고 황급히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같은 회사가 아니라는 점, 나이가 본인보다 더 많다는 점만 아니었으면 한 대 치고 싶었다는 대리님의 메시지에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하지만 스스로 시크한 척 살아가는 대리님과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사 문화와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던 대리님은 얼마 전 10년 근속상을 받았습니다. 


축하와 함께 요즘도 캐릭터 잘 유지하고 있냐는 제 메시지에 답이 없는 걸 보니 아마 차단을 당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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