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 회사에서 11년을 재직하며 만난 파트너사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보는 시리즈입니다.
어느 날 어린이 완구 방송을 배정받고 전략 회의를 들어갔습니다.
회의실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MD가 저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PD님. 협력사 직원분들 포스가 좀 있는데 회의실 들어가도 너무 당황한 티 내지 마세요. 알겠죠?"
뚱딴지같은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잘 나가거나 성향 자체가 강성인 협력사의 경우 꽤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뭐 기분 나쁘더라도 이해해 달라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MD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번 방송 담당하게 된 PD입니다. 잘 부탁.."
MD의 사전 경고에도 저는 회의실에 들어서며 말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우락부락한 체격, 흔치 않은 검은색 양복, 짧은 머리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는 또 하나의 증거.
"아이고 PD님 안녕하세요? 00 완구 커머스팀 팀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환하게 웃으며 두꺼운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팀장님의 얼굴에는 꽤나 길게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저는 악수를 하며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췄습니다.
그리고 슬쩍 MD를 쳐다보니 여전히 웃겨 죽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방송 매출이 안 나오면 어디 장기라도 하나 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팀장님 옆에 있던, 자신을 과장이라고 소개한 분이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오늘 방송할 상품들을 다 보여드려야 하는데요. 저희 아들이 어제 샘플 하나를 가지고 놀다가 고장을 내버렸어요. 준비가 미진해 정말 죄송합니다. 방송날은 완벽하게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김 과장 아들이 벌써 전과 3범째예요. 회사에 맨날 놀러 오더니 어제 또 사고를 치더라고요. 하하하하"
팀장님과 과장님의 만담 속에 전과라는 단어가 괜히 더 귀에 들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생각보다 다 밝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회의가 진행되고 팀장님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PD님. 정말 바쁘시겠지만 저희 회사에 저희 완구로 만든 놀이방이 있어요. 직원들 아이들도 많이 놀러 오거든요. 거기를 좀 촬영해서 방송에 쓰면 어떨까요? 저희 방송 라인업도 다 갖춰져 있고 따로 시연할 필요 없이 아이들이 다 잘 가지고 놀아서요. 다만 저희 회사가 조금 멀어가지고 시간이 되실지.."
"네! 가야죠! 언제 가면 아이들이 제일 많을까요?"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MD는 옆에서 거의 배를 잡고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시간을 내어주시면 그때 맞춰 아이들 다 오라고 할게요. 다 자주 봐서 친한 아이들이라. 직원들도 좋아하겠네요 하하하"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저는 MD의 멱살(?)을 잡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제가 생각한 거 맞아요?? 저 이러다 매출 안 나오면 어디 암매장당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킬킬대던 MD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하시던 그런 쪽 출신들은 맞으세요. 그런데 꽤 옛날에 손 털고 다 의기투합해서 회사 만드셔서 고생 많이 하면서 이만큼 키우셨어요. 다들 순박하시고 오히려 너무 좋으세요. 방송에도 적극적이시고 저희가 요구하는 것도 거의 다 수용하는 편이에요. 다른 편견 갖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많이 웃고 말투도 공손했던 직원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고 바른생활을 하는 조직 스토리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약속한 날짜에 저는 회사가 있다는 남양주시로 향했습니다.
회사에 들어서자 하나같이 눈빛이 범상치 않은 분들이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PD님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다 오지 않아서요. 여기 바로 옆에 저희 단골 식당이 있는데 식사 먼저 하시죠! 이 대리!! PD님 식당 안내 해드려라!"
"네 행님!!"
"회사에서는 직급으로 부르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냐"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사들이 오가며 저는 대리님과 내 덩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또 다른 한 분의 안내를 받아 한 백반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가 좀 소박해 보여도 정말 맛이 좋습니다. 만족하실 겁니다. 이모 여기 백반 하나에 제육 추가요. 귀한 손님이니까 잘 좀 해줘요"
대리님의 주문하는 소리를 들으며 숟가락 등을 세팅하는데 문득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 왜 두 분 다 서계세요....?"
"저희는 아까 왕창 먹어서 괜찮습니다. PD님 맛있게 드십쇼"
"네네 맛있게 먹을 건데요... 아니 그러니까 왜.. 거기 서계시는지... 여기 앉으세요"
"저희가 이게 편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길 아니까 식사하고 회사로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아마 혼날걸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대리님의 대답에 더해 제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산만한 사내들이 꼿꼿하게 서있는 상황에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습니다.
정말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을 알지만 이분들을 제가 밥을 쓸어 담듯이 먹는 동안 정말 미동도 없이 서있었습니다.
촬영은 특별한 일 없이 끝났습니다. 아이들끼리 다 친해 보였고 직원분들도 서로 격 없이 지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방송 준비를 하면서 팀장님과 꽤 자주 통화를 했습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팀장님 목소리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소통은 늘 잘되었고 좋은 방송을 위한 과한 요청에도 오히려 죄송할 만큼 협조해 주시고 최선을 다해주셨습니다.
다행히도 방송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매출 이야기를 하면 잠시 방송 리뷰를 하고 있는데 후배로부터 스튜디오 출구와 이어져있는 회사 후문에 검은색 차량이 한대 두대 나타나더니 덩치가 산만한 검은 양복 부대(?)가 내렸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기 혹시 이권 다툼 생겼냐는 후배의 말에 피식 웃으며 팀장님과 함께 스튜디오를 나섰습니다.
후문에는 서너 명의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팀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입을 모아서,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팀장님을 맞았고 저에게도 처음 뵙는다며 깍듯이 인사를 했습니다.
"PD님 혹시 바쁘세요?"
"아닙니다. 이제 점심 먹고 일하러 가는 거죠 뭐"
"괜찮으시면 저랑 식사하실래요?"
예상치 못한 팀장님의 제안에 저도 모르게 알겠다고 답을 했습니다.
저랑 팀장님을 영화에서나 보던 미닫이문이 있는 일식집으로 데려다준 나머지 직원분들은 식사 맛있게 하시라는 말과 함께 모두 사라졌습니다.
단골인 듯 팀장님은 익숙하게 주문을 했고 꽤 호화로운 음식들이 연달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PD님은 술을 좋아하시나요?"
팀장님의 갑작스러운 말에 술도 한잔 하자는 이야기인 것 같아 주당은 아니어도 꽤 즐기는 편이라고 답을 하고 싶었지만 업무 시간 중에 술을 마실 수는 없어서 그냥 술이 많이 약하다는 답을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제가 꽤 오래전에 술을 끊어서.. 술 좋아하시면 제가 흥을 깰 뻔했네요"
팀장님은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뭐 느끼셨겠지만 저도 그렇고 지금까지 보신 직원들 모두 옛날에 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저도 고민이 많았지요. 그런데 제가 참 따르던 중간 관리하던 형님이 아이가 생기더니 더 이상 이런 일은 안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비슷한 생각을 한 저를 비롯한 꽤 많은 친구들이 큰 대가를 치르고 같이 나왔습니다"
팀장님이 얼굴에 있는 칼자국을 어루만졌습니다.
"저희가 뭐 할 줄 아는 게 있겠습니까. 그냥 형님 믿고 다 같이 막노동도 하고 하다가 작은 회사를 차려서 발로 뛰면서 이것저것 했습니다. 안 해본 게 없어요. 그래도 다들 순진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서로 돈도 나누고 힘든 일 있으면 품앗이도 하면서 버텼어요. 그러다 운 좋게 형님이 아이템 몇 개를 잡으셔서 장사해 보자 하시더라고요. 막막하다가 할 일이 생기니까 얼마나 좋아요. 다들 옛날에 목숨 걸고 싸운 것처럼 영업을 하고 다녔어요. 성질 못 참고 사고 쳐서 내보낸 친구도 있고 과로해서 죽은 친구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이만큼 회사를 키워냈습니다. 지금 몸은 힘들고 괜스레 호기심 어린 시선도 많이 받고 오해도 받지만 떳떳하게 일하니까 행복합니다"
아마 제가 태어나서 본 가장 진실된 눈동자와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팀장님과는 그 이후로도 몇 번 방송을 같이하며 저도 모르게 세워두었던 관계의 벽을 많이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청명한 어느 가을날. 회사와 팀장님의 초대를 받아 남양주 근처 캠핑장에서 진행하는 야유회에 참가했습니다.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컸습니다.
정말 애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직원분들의 대화와 농담을 듣고 있자니 술 한병 없어도, 외부인이어도 저 역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유회를 즐겼습니다. 티 없이 맑은 아이들과도 헤어지기 아쉬울 만큼 친해졌습니다.
제가 홈쇼핑 PD가 아니었으면 이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