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되어야지
중학교 1학년, 처음 우울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어려운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이 절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엄마 혼자 애쓰는 것도, 공부를 나쁘지 않게 했던 오빠가 마이스터고에 가는 것도 싫었다. 계속 그 싫은 걸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린 나이에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텐데 죽음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감당하기엔 그 현실이 벅찼다. 아마 사춘기와 우울이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만 나에게 왔더라도 그 정도까진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둘은 내게 동시에 찾아왔고 나는 아픈 13년도를 보냈다. 이듬해에는 왜인지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사춘기였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 내게 우울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 오는 손님처럼 우울은 계속 문을 두들겼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할 때도 많았지만 이따금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한 번 들어오면 좀처럼 나갈 줄을 몰라서 나는 꽤나 괴로워했다. 모든 생각에 우울이 들러붙어 나를 끌어내렸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생각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자주 떨곤 한다. 나만 그런 줄 알았지만, 내겐 나 같은 친구가 있었기에 우리 같은 사람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을 보는 우리가 우울을 내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울한 것이 나의 기질이라고 믿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자주 우울하기도 하지만 난 평소 굉장히 비관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내 생각은 긍정적으로 흐를 줄을 모르는지. 내가 경험한 것들이 부정적인 것들이라 그럴까. 그러기엔 내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들이 없었다면 이 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계속 살게 하는 내 사람들이 있어 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들이 슬프길 절대 바라지 않기에. 그 이유가 심지어 나라면 나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들이 나를 소중히 여기듯 나도 그러면 될 터인데, 내가 그들을 아끼듯 나도 나를 아끼면 될 터인데. 그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내가 나를 예뻐해 주고 칭찬해 준 적이 얼마나 있었나. 나는 밖에서 오는 사랑만 먹고 자랐다. 내가 견고해야 모든 것들이 단단하다고 하는데, 나는 나무가 아니라 강아지풀 정도일 것이다. 쉽게 꺾이고, 휩쓸리는..
아무튼 나는 나무가 될 것이다. 어쩌면 강아지풀이 나무가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무가 되어서, 스스로 잘 서있을 수 있게 되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될 것이다. 내가 먹고 자란 사랑을 열매로, 가지로, 기둥으로 나눌 수 있게. 그러려면 일단 내가 강해져야 한다. 우울을 마주해야 한다. 마주 보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 우울이 원치 않게 찾아오는 감기 같은 거라지만, 나는 그 감기를 무찔러 낼 거다.
계속 나를 달래고, 보살피고, 물을 줘서 나무가 되어야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 그늘에서 쉬어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