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카 세계 여행 에세이 23 - 폴란드 오시비엥침
캠핑카 세계 여행을 설계하면서 꼭 가봐야 할 장소 중 하나로 생각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일어난 가장 끔찍한 대학살이 수년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던 비극의 현장.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크라쿠프에서 아톰을 몰고 두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이 곳의 폴란드 지명은 오시비엥침이고 독일이 점령하면서 독일식 이름 아우슈비츠로 바꿔 불렀다.
우리의 여행도 어느덧 10월 중순을 넘겨 19일이 되고 있었다. 수용소 박물관에 도착하니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고 있다. 정보를 검색할 때 사전 예약을 해야만 한다고 들었지만 일정을 확정하기 어려운 우리로서는 사전 예약을 할 수 없었다. 사전 예약 없이 현장에서 표를 구해 들어가야지 하고 왔는데 사전 예약은 언어별 가이드 동반 관람의 경우이고 우리처럼 가이드 없이 개별로 관람하는 경우에는 무료입장이란다. 표 판매 박스에서 개별 관람이라고 하니 간단한 종이 한 장을 준다. 그것을 입구에 보여주면 입장이 가능하다. 어찌 보면 이 비극의 현장이 어디 폴란드만의 일이며 유럽만의 일이겠는가? 인류 모두의 일이지 않겠는가! 입장료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고 가이드 비용을 받는 것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어별로 가능한 가이드수가 정해져 있으니 사전 예약을 우선 하고 남는 인원이 있으면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어 가이드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오늘은 안개가 수용소 분위기를 음침하게 만드는 조금 쌀쌀한 날이다. 박물관 입구를 지나면 수용자들이 맨 처음 들어갔던 수용소 입구가 나타난다. 그 수용소 문 위에 걸려 있는 독일어 글씨가 보인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
이 글귀를 보면서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열심히 일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노동할 수 없는 자나 노동생산성이 낮은 자는 죽음이다라는 말이 된다. 실제로 노동력이 없는 병든 사람이나 어린아이, 여자들 대부분이 가스실로 갔으니 말이다. 심지어는 같은 독일 민족의 장애인들 조차도 수용소로 보내지고 결국 가스실로 보내졌다고 한다.
전시물 중에서 아내와 나의 관심을 끄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폴란드 국민들이 수용소 유태인들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전시실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초기에 정치범을 수용하기 위한 작은 규모로 시작되었지만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 따라 그 규모가 커진 것이다. 당시 오시비엥침 지역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수용자들을 돕기 위한 일들을 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건물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폴란드에서도 일어난 유대인 말살 정책에 대한 반성이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동조하였고 그 규모와 기간은 다르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일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시물이 마치 폴란드의 과오를 덮어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군석 어딘가가 불편해진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스실로 향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들이 수용소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진 찍고 웃는 모습들이 자주 보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 끝자락에 있는 가스실 앞에서 한결같이 엄숙해지고 조용해진다. 이제 그 머리에서 상상하기 힘든 과거의 일과 직접 만나는 순간이다. 어찌 웃을 수 있겠는가? 아니 웃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지 모르겠다.
한 명씩 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따라가면 여러 개의 가스실들이 나타난다. 가스실은 조그마한 구멍으로만 안을 볼 수 있다. 저 크지 않은 공간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갔어야 할 사람들. 가스실 관람로를 따라 나오면 죽음의 벽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은 매우 소박한 벽이지만 과거에 총살 현장이기도 하였던 곳. 그 벽 앞에는 촛불과 꽃들이 놓여 있다. 단체로 온 학생들이 선생님과 함께 초에 불을 붙이고 헌화를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기침 소리조차도 없는 이곳. 내 가슴이 멍먹해진다. 한동안 우리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이 수용소에 처음부터 가스실이 운영되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총살로 처형을 했는데 그 처형을 담당했던 군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처형에 따른 비용 때문에 보다 경제성 높은 방식의 학살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바로 가스실이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을 한다고 속여서 옷을 모두 벗게 했다. 총살의 경우에는 군인들이 직접 옷을 벗겨 전쟁 물자로 재활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가스실의 경우에는 수용자들 스스로가 그 일을 대신하니 나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경제적인가? 그리고 전쟁에 사용해야 할 총알도 아낄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화장터로 옮길 때에도 직접 하지 않고 유대인 수용자를 시켜서 했으니 그 얼마나 효율적인 것인가? 그래서 가스 처형 방법이 개발되었을 때 나치가 엄청나게 반겨했다고 한다.
어떻게 같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미워할 수는 있지만 이 지구 상에서 없애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 2차 대전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전쟁의 배경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인종 그 자체를 말살하려고 대규모 인종 학살을 수행한 적이 우리 인류 역사에 얼마나 있을까? 그 예를 나는 찾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치를 포함해서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유태인 학살 동조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바우만이라는 사회학자는 그 배경에는 현대사회의 고유한 문화인 ‘정원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의 정원문화는 필요한 것만 심어 놓고 불필요한 풀을 뽑아서 제거하는 문화를 특징으로 한다. 쉽게 생각해 보면 잡초를 뽑아서 버리고 정원에 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구 상의 어떤 풀이 처음부터 잡초로 태어났는가? 그 모든 것이 존재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적인 이유 만으로 농작물 이외의 것을 잡초로 여기고 뽑아버린다. 사실은 같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우만은 그 잡초를 뽑아버리고 정원을 아주 정돈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는 정원 문화가 사회에도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가치를 받아들일 때, 우수하고 건강한 인간들로 사회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러한 기준을 벗어난 사람들이나 인종을 없애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 중에서 왜 장애인들이 이 수용소에 끌려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나치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나 정치인들도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원의 잡초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유럽의 대학살 사건은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관점이나 옳음이 있고 그에 반하는 것을 제거해도 된다는 문화가 부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비극이 유럽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그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독일은 아직도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지만 아시아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당시의 망령들을 되살리려는 시도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존재하기 위해 서로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과거 역사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 시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나서 해남에 지을 집의 정원도 잡초가 하나 없는 정원이 아니라 잡초도 같이 자라고 어울릴 수 있는 정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관람을 마치고 인근 숲 속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 산책에 나섰다. 오시비엥침의 외곽지역이어서 주택들이 뜨문 뜨문 있다. 산책하다 보니 넓은 공터에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스실이 설치되기 전에 운영되었던 초기 가스실 건물 터란다. 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이곳으로 데려와 가스 처형을 시작했던 곳이다. 그리 크지 않은 터에서 시작된 가스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인근의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확대된 것이다. 안내판 만이 그 역사를 설명하고 있을 뿐 방문객은 없는 곳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발자국도 없고 풀들이 아주 파릇파릇하게 곧게 자라고 있고 별도의 주차장도 없는 곳이다. 인류의 대비극적인 사건도 이렇게 조그마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비극이 시작된 아픔의 공간인지도 모르고 어젯밤을 보낸 것이었다.
산악 휴양도시인 자코파네 방문은 포기하고 오늘 체코로 넘어가기로 하였다. 가는 길에 어제 가보지 못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에 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들렀다. 그 규모가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훨씬 큰 규모라는 점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수용소 한쪽에서 반대편 끝까지 가기 위해서 차로 한참을 달려야 할 정도로 상상 이상으로 큰 규모이다. 자료에 따르면 면적이 175헥타르라고 하니 여의도 면적의 절반 정도가 된다. 나치 퇴각 시, 증거를 없애기 위해 대부분의 건물을 파괴하여 지금은 앙상한 느낌을 주지만 그 규모 자체 만으로도 비극적인 사건이 얼마나 대규모로 이루어졌는지를 충분히 실감하게 한다. 사실 400만 명 이상을 학살하기에는 아우슈비츠 규모가 작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보는 순간 정말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오늘도 안개가 끼어 있다.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