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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Oct 17. 2023

동공이 약간 흔들리고 있을 안나에게

편지를 쓰다 중간에 잠깐 잠이 들었던 미니가


 동공이 약간 흔들리고 있을 안나에게



 지금은 3시 36분입니다. 이 시간은 심야인가요, 새벽인가요. 날짜가 지나 저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새벽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암흑입니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시간이라, 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지금은 다시 자야 하는지 이대로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지 난처한 상황입니다. 사실, 모기에 시달려 일어났다가 아직 해야 할 일을 끝마치지 못했던 게 기억 나 컴퓨터를 켰습니다만 아직 머리가 깨어나지 않은 이 상태로 안나에게 글을 써도 되는지…. 앞으로의 헛소리에 대한 장황한 변명을 미리 해보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지난 화상 대화에서 말했던 대로 나는 ‘나를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누게 될 주제를 고민하다가 나의 요즘 고민 꼭지 중에 하나인 ‘나'에 대한 탐방에 되돌아온 안나의 질문에 숨을 헉-하고 마셨습니다. “나를 왜 찾는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는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두려움마저 느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찾아야 하지?

미니, 나는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주제를 들었을 때,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그거였어. 나를 왜 찾아야 할까? 나를 꼭 찾아야 하는 걸까??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지? 어떻게 찾아야는 거지?

어디서, 어떻게, 왜, 누구와?

나는 없어도 잘 살고 있는데, 그거 왜 찾아야 해요?

미니, 나의 삶은 평온했는데. 나 너무 어려워요, 너무 힘들어요.”


 안나, 우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기에 앞서 이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우리 둘 중에 물음표 살인마가 한 명이 더 있었어요.


 헉-하고 놀랐던 ‘나를 왜 찾는 거냐'는 질문에 이 전에 답한 것과 다른 접근을 시도해 볼게요. 우선 ‘나’는 ‘나’를 잘 모른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말하는 ‘나'는 모든 개인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쓸게요.) 몰라도 평온하다는 건, 몰랐기 때문에 불편함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를 포함한 주변을 둘러보면 종종 자신을 잘 몰라서 엉뚱한 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돼요. 슬픔을 화로 표현해 관계를 망치거나 진정으로 욕구/욕망하는 것을 알지 못해 무관한 것을 과도하게 소비하거나 집착하는 것들이요.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법을 알지 못해 몸이 아픈 사람들도 알고 있어요. 안나와 나도 이미 한차례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죠. 물론 상황적인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나'를 더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문제가 내 삶에 부닥쳤을 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지 않을까 싶어요. 잘못된 결과가 도출되더라도 설정값을 달리해 시도해 볼 수 있잖아요. 하지만 세팅값을 모른다면 수정하고 비교할 수 없지 않나요? 나는 되도록이면 나쁜 일은 두 번 이상 겪고 싶지 않아요. 


 어디서라, 글쎄요. 나 역시 지금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인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엔 더욱 ‘경험'에 치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취향을 만들고 감도를 높이는 과정은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니까요. 그런데 외부활동으로 부풀려진 나의 어떤 파편들은 과거의 나의 유산과 함께 꿰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지금의 나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나는 나의 유산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우울과 무기력이 찾아오는 해프닝을 겪었지만, 그만큼 또 단단해짐을 느껴요. 아, 그러고 보니 ‘예민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죠. 안나는 예민함이 힘들어 그 감정이 여과되지 않고 흐르게 둔다는 거요. 반면에 점차적으로 둔감해지는 것이 우려스럽다고. 그것 역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안나가 느끼는 예민한 지점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그리고 그것을 예민하게 느끼게 된 과거의 경험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보는 것도 방법일 것 같아요. 


 제가 상담치료를 받으면서 들었던 조언 중에 하나가 내가 어떤 드라마나 영화, 관계 속에서 공감을 하거나 예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나에게 풀리지 않은 같은 지점이 있어서래요. 부끄럽지만 저는 울보라 자주 코끝이 찡해지는데, 요즘 올림픽 시즌이라 특히 미디어를 경계하고 있어요. 국적과 승패를 떠나 경기에 집중하는 선수들의 얼굴을 볼 때면 가끔 울컥 뜨거움이 밀려오거든요. 그 감정은 선망과 창피함을 담고 있어요. 처음엔 전염된 열기, 혹은 선수들의 고생에 대한 공감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다른 것들과 연결해 보니 저는 한 영역에 집중해서 경지에 다른 사람들의 존경과 더불어 일종의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선망했으나 도달하지 못한 영역. 그리고 지금 나를 평가하자면 그러한 도전을 할 수 있는 재질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그런 시도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 이런 말을 하는 것 마저도 정말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무겁게 이야기를 끝마칠 것은 아닌데, 아무튼 그래서 저는 더욱더 나의 ‘쓸모'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이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무엇인가 해보고 싶어요. 그 미션을 찾고 실행하고 싶은 게 제 욕망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신을 찾는 것과 인생에 꼭 목적과 목표를 찾는 것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네요. 연결성은 있지만 별개의 일인데 말이죠.)


 이 시점에 안나의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그런데 꼭 찾아야 하느냐. 글쎄요, 꼭이라고 물어본다면 제 대답은 아니에요.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삶의 형태도 가치관도 다르죠. 인생의 정답이라는 것이 없듯 이것은 그냥 개인의 인생관이니까. 안나, 지금이 좋다면 그대로가 좋아요.



 편지를 쓰다 중간에 잠깐 잠이 들었던 미니가

 







Photo l © 안나와 미니 

2021년 카타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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