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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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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재 Jul 31. 2020

침묵의 마을에 든 여인

-양양 복골마을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에서 그 여자는 책 속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멀리 설악산을 품은 상복마을로 들어왔다.     

  

운무로 치장 한 마을 어귀에서 맞는 아침 찬 공기는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방금 모내기한 여린 색들 아른아른 떠 있는 지금 여기, 이 곳은 어제로부터 더 먼 어제로부터 떠나온 나의 기록을 지우는 곳, 오늘만 기록 하는 곳이다.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딱딱한 침묵의 마을을 더듬거리며 걷는다. 걸음은 글쓰기의 쩔뚝거림이자 기다림인 동시 생각을 잠시 비우는 시간. 시야 가득 연푸른 풍경이 노트 낱장처럼 펄럭펄럭 날아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그만 여물지 못한 채 발바닥에 서걱거리는 호두알이 되었다. 담장 너머 채마 밭 일가족을 이루고 옥수수 울타리를 치는 초록에 나는 서성이는 그림자였고, 구불구불 골목마다 매여 있는 개들과 길고양이들 장작더미를 들추고 낮 달맞이꽃 물들어가는 틈새, 텅 빈 마을회관 앞 외양간 끝없는 기다림의 눈망울 누렁 소는 순간의 정물화였다. 그 너머 마을은 풍경화. 정물과 풍경 사이 불쑥 나온 길의 끝. 수령 깊은 당산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 깃털처럼 흔들리는 아래로 한 여인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소설 책 페이지를 넘기는 그 여자와 자연 속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촉각과 시각에서 잠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넘어온 시간이자 내가 잃어버린 시간 딛고 갈 수밖에 없는 생각에 몸과 마음의 끈이 흔들리다 도착한 할미소는 얄팍한 계곡이다. 구부러진 무릎 펼치면 닿을 듯 물웅덩이 수면위로 스며든 빛의 조각들 흔들리고 있다. 산딸기 물러터진 깔끄막 기어오르다보면 이곳엔 나를 받아주지 않는 길 하나 있다. 마을과 연결된 산길로 가는 육군 모 부대의 사격장. 사이와 간격의 그 어디쯤에 서면 숲을 울리는 총성과 함께 길을 막는 군인의 근엄한 말투는 바람에 신발 끈 풀어진 듯 조각조각 흩어진다. 


산비탈 초록열매 보랏빛으로 여물어가는 블루베리 밭에서 잡초와 뒹굴고 있는 그 여인. 불면의 밤을 지날 때마다 한 그루씩 잠을 기다리듯 심어낸 땅과 나무의 만남이 익어간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깜깜한 밤을 견딘 무게가 주렁주렁 이야기를 엮으며 오는 여름을 하나씩 따 주머니 가득 채우고 있다. 생의 통로가 되어 준 보라보라 이 열매들 빛날 때마다 그리웠던 옛사랑을 만난 듯 설렘 한가득한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일상을 심어 노후의 희망이 된 그녀 삶을 읽다가 보듬지도 털어내지 못하는 시 쓰기에 얼마나 무력했던가, 아무것도 아닌 내 상처 포장하기 바빴던 시절이 거기에 있어 에코백 안 가득 내 감정 숨기고 말았다. 늘 무언가 가로막아 결핍된, 불안하게 절룩거리는 단어들이 엉켜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문장에 나는 자꾸 서성이는 사람이었다.


잠시 생각 비우기를 해 보려 하는데

그러나 

비워지지 않는다  

   

블루베리 밭 옆구리로 우거진 덤불을 헤쳐 본다. 비탈진 흙더미 움켜쥔 모든 뿌리와 함께하는 틈으로 몇 가닥의 고사리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생각을 꺾다가 몸에 선을 긋고 가는 찔레꽃가시 아린 살갗을 달래기 위해 물맛 자랑하는 말미골 재 넘어 ‘복골샘터’로 향했다. 내일로 가는 오늘만 기록 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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