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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l 17. 2024

사랑의 작대기

 두 번째 소주잔을 비웠을 때 차주혜가 말했다.  

   

 “형사 5 단독엔 형이 너무 높아요.”     


 술 마실 때마다 빼먹을 수 없는 단골 안주, 정보 교환의 장이 펼쳐졌다.      


 “나도 거기 선고 듣고 깜놀 했잖아. 판사님이 피고인들을 싫어하는 것 같아.”

 소소한이 맞장구쳤다.      


 “유독 왜 거기만 그럴까요?”

 “몰라. 소송 지휘도 마치 원한 맺힌 것처럼 하셔. 어찌나 무서운지 내가 다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니까.”

 “맞아요. 저도 그 법정 들어갔다가 시베리아인 줄. 으슬으슬하니 냉기가 온몸을 감싸더라고요.”  

   

 주혜와 소한, 민우가 주거니 받거니 불만을 토로했다.     


 “아. 난 겨우 이혼 사건 하나 끝냈는데 오늘로써 다섯 번째 조정기일이었어. 조정 안되면 조정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분위기더라고. 점심도 거르고 네 시간 넘게 힘겨루기 하다가 당사자들이 모두 지치는 바람에 합의하고 탈출할 수 있었어.”

 수민이 말했다.


 “요즘 이혼 사건은 될 때까지 조정시키는 경향이던데요.”

 민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엔 가압류 가처분이 엄청 어려워진 거 알아요? 본안소송만큼 소명방법을 제출해야 인용해 주는 것 같던데요. 집행정지는 더 어렵다던데. 김은영 변호사님은 어떻게 그걸 받아내셨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주혜가 지아를 추켜세우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아, 사회생활 만렙이었다. 저래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차주혜, 차주혜 했던가.     

 

 지아는 해롱해롱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오늘 술은 내가 사야겠는걸. 차변 먹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주혜는 네네, 하며 애교스럽게 고갈비를 먹고 싶다고 했다. 지아는 고갈비와 막걸리를 주문해 줬고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손님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방금 들어온 커플은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들어올 때부터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들은 사귄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아니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금지된 사랑을 하는지, 무척 절절했다. 내내 손을 꼭 잡고 다정한 시선을 교환했고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남자는 이따금씩 여자의 볼에 쪽쪽 입을 맞췄고 여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지아의 테이블에선 주종(酒鍾)을 바꿔 막걸리로 목을 축이기 시작했고 빈 병이 늘어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고 있었다. 밖은 점점 어두워져 상대적으로 가게 안이 전보다 밝게 느껴졌다. 감색 조명이 천막을 감싸며 은은하게 빛났다.      


 조도가 낮은 백열등 불빛에 눈이 익숙해질 때쯤 민우의 콧날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성이 마비된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민우를 쳐다봤다.      


 언제 봐도 참 잘생겼다. 절로 헤죽 웃음이 나왔다.


 그때 사장님이 어묵탕과 계란말이를 내왔다.      

 “서비스입니다.”

 “아유. 감사드려요. 사장님. 잘 먹겠습니다.”     

 서비스에 감동해 수민이 추가로 오징어볶음을 주문했다.     


 “여기 정말 푸짐하고 맛이 좋네요.”


 주혜가 요리를 칭찬하며 계란말이를 오물거렸다. 배가 부르고 정신이 몽롱해서인지 다들 자세가 느슨해졌고 눈동자도 풀렸다.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막거리를 입에 털어 넣던 소소한이 말했다.      

 “캬하~~ 술맛 좋다.”     


 그리고선 옆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그런데 우린 짝이 안 맞네요. 이렇게 모일 거였으면 민선혁 변호사님도 부를 걸 그랬어요.”

 “여기가 무슨 미팅 자리인가? 짝을 맞추게…”     


 그럴 의도는 아니겠지만 소소한이 흥겨운 자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수민이 못마땅해서 소소한을 나무랐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거렸다.      


 “이변호사님은 민선혁 변호사님과 대학 동기라면서요? 학교 다닐 때 많이 친했어요?”

 “친하긴. 뭘. 얼굴만 아는 정도? 그건 그렇고 소소한! 자리에 없는 유부남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시지?”

 수민이 지아를 의식해서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소소한은 묘하게 대화를 끌어갔다.     

 

 “말 나온 김에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니. 묻지 마.”

 수민과 소한은 꼬인 혀로 계속 티격태격했다.     


 “하하하. 이 변호사님. 그렇게 딱 잘라 말할 때 엄청 귀여운 거 아세요? 민선혁 변호사님도 그런 말 안 해요?”

 “까분다~~ 소변!”


 “으악.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변호사님. 저 놀렸으니까 대답해줘야 해요. 네?”

 “뭔 소리래?”     


 흐느적거리며 수민이 지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때 소소한이 물었다.


 “이 변호사님은 남자친구 있어요?”

 “남자친구는 무슨. 소송하면서 나, 사랑에 대한 환상이 다 깨졌잖아. 소변! 그런 의미에서 한잔 더!”


 수민은 술을 더 달라며 소소한에게 잔을 내밀었다. 둘은 금방 화해한 모양으로 술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차에 차주혜가 어묵 국물을 떠먹던 수저를 놓쳐버렸다. 짤그락하고 시멘트 바닥에 스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이. 참. 오늘 처음 입은 건데…”


 수저가 떨어지면서 주혜의 원피스에 국물이 튀었다. 민우가 재빨리 테이블 위의 휴지를 뽑아서 주혜에게 건넸다.      


 “어머. 고마워요. 역시 정변호사님은 센스 짱!”


 주혜는 까르르 웃으면서 민우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톡 쳤다. 그리고 민우에게 물었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성격까지 좋은 정변호사님은 분명, 애인이 있겠지요?”

 “아뇨.”

 민우가 담담하게 답했다.     


 “아아. 그랬구나~ 여자친구 없구나. 저도 남자친구가 없어요. 지금은…”

 주혜가 얼굴을 붉히면서 솔로임을 털어놓았다.     


 “와아. 섭섭하다. 차변. 정변한테만 묻고 말이야. 나한텐 여친 있냐고 안 물어 봐주나?”

 소소한이 끼어들었다.     


 “소변님은 딱 봐도 없을 것 같은데요.”

 “뭔 소리야.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이 외모에, 학벌에,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완벽한 남자를 찾겠어.”

    

 얘들 뭐야. 대놓고 사심을 드러내고 있잖아.     


 지아는 점점 자리가 불편해졌다. 그때 주혜가 소소한의 주접을 사뿐히 무시하고 지아에게 말을 걸었다.      


  “은영 언니. 언니는 수민 언니랑은 언제부터 베프였어요? 아, 참. 회사도 아닌데 여기선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이미 언니라고 부르면서 주혜는 동의를 구했다. 그것도 언니라는 단어에 꼬박꼬박 강세를 넣으면서, 순진한 표정으로.      


 “그래요. 뭐. 맘대로.”


 지아는 주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남아있던 술을 들이켰다. 속이 쓰렸다.      


 마침 옆 테이블의 남자가 여친에게 담배 한 대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아도 덩달아 일어섰다.    

  

 “왜? 화장실 가게?”

 수민이 물었다.      


 “응. 술도 좀 깨고… 나갔다 올게.”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앞서 나가는 남자를 따라 나갔다. 등 뒤에서 또랑또랑한 주혜의 목소리가 날아와 귀에 박혔다.      


 “우리 동기인데, 오늘부터 그냥 이름 부르면 어떨까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우에게 하는 말이란 걸.   

   

 가게를 나서자 찬바람이 지아의 얼굴을 때렸다. 이차 장소를 물색하는 한 무리가 갈지자로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지아는 잠시 포차 거리를 벗어나고 싶어서 조용한 길을 찾아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겉도는 기분이네. 나만 선임이어서 그런가?      


 민우가 매너 좋은 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맘에 안 들지? 아냐. 아냐. 그건 민우 천성인걸.  

   

 술 취해서 한 말인데 왜 주혜가 얄밉지? 주혜는 하필 오늘 혼자만 한껏 꾸미고 나왔지?     

 

 아니지. 아냐. 주혜는 평소에도 예쁘게 하고 다녔잖아. 나도 이제 슬슬 신경 좀 써야 할까?     


 아, 정말 민우는 주혜에게 맘이 있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지아는 괜스레 울적해졌다.      


 모조리 쓸데없는 생각이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저 멀리서 기타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지아는 홀린 듯 소리의 출처를 향해 걸었다     


 ***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수민이 말했던 버스킹 장소인 것 같았다. 덩치가 산 만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바로 곁에는 친구로 보이는 다른 남자가 트럼펫으로 반주를 넣었다.    

 

 사람들은 둘 곁에 모여 서서 리듬에 맞춰 양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서 높이 들고 흔들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가사가 꼭 지아 마음 같았다. 노래를 듣다가 감정이입이 되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새 삶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도 이상하게 서러웠다. 지아가 감상에 젖어있을 동안 노래가 끝났고 싱어가 일어나 몇 마디 했다.      


 “이 가을. 여러분과 함께해서 정말 행복하네요. 바람은 선선하고 별은 반짝이고 아름다운 밤입니다. 다음 곡은 뭘로 하면 좋을까요? 아. 이 친구의 연주가 빛나는, 템포는 빠르지만 가사는 으스스한 곡으로 한번 불러볼까요?”     


 싱어가 연주자를 가리키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고 트럼펫으로 전주가 시작됐다.  

    


Oh, the shark has pretty teeth, dear

And it shows them pearly white

Just a jackknife has MacHeath, babe

And it keeps it way out of sight     ……



 맥 더 나이프였다. 트럼펫과 노랫소리가 정말 잘 어울렸다. 사람들이 우와아, 소리를 질렀고 순식간에 여럿이 가까이로 몰려들었다. 그 틈에 지아가 발목을 삐끗하고 몸이 기우뚱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뒤에서 양어깨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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