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모임에 은영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둥대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서둘러 일을 마쳤다. 머릿속에서 케이윌의 ‘말해! 뭐해?’가 절로 재생되었고 가사를 흥얼거리는 동안 같은 비트로 민우의 심장도 뛰었다.
이토록 설렐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로비로 내려갔는데, 민우와 달리 은영은 안색이 안 좋았다. 지하철에서도,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은영은 언짢아 보였다. 잠깐 희미하게 웃는가 하면 곧 굳은 얼굴로 되돌아갔다.
왜? 뭣 때문에 기분이 별로일까?
그녀는 민우에게 눈길도 안 주고 말수도 적었다. 그러더니 화장실을 간다며 갑자기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섭섭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그렇지만 걱정이 한발 앞섰다.
민우는 혼자서 공중화장실을 다녀오는 은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밖이 어두운데 괜찮을까? 별일 없겠지? 취객이 많을 텐데…… 따라가 볼까?
내적 갈등으로 복잡한 와중에 주혜가 술잔을 부딪혀 왔다.
“정 변호사님! 왜 대답을 안 해요? 이름 부르는 거 거절하실 거면 한잔 더해요.”
하면서 재촉했다.
“뭐 해? 정변. 차변이 아까부터 계속 술잔 들고 기다리잖아. 그냥 마셔라. 마셔.”
소소한이 옆에서 거들면서 음주를 부추겼다. 수민은 이미 불콰한 얼굴이 되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민우만 속이 탔다. 문밖으로 온통 신경이 쏠렸다. 아무래도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원샷으로 막걸리 사발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저 화장실 좀…….”하면서 일어났다.
급하게 둘러대고 가게를 나서려다 막 들어오던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민우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손님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몰골이었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만 내저을 뿐이었다. 민우는 비켜서서 길을 틔워주고서 문을 닫고 나와 밖을 두리번거렸다.
금방 따라나섰다고 생각했는데 은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공용 화장실 주위를 몇 차례 기웃기웃했지만 그녀를 찾지 못했다.
혹여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토하고 있을까 봐 민우는 화장실 근처를 떠날 수 없었다. 노심초사하며 서성이다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고 있는 은영을 발견했다.
거리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민우의 눈에 비친 그녀는 무척 작고 가녀렸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뒷모습이 무척 짠해 보였다.
그녀의 걸음걸이가 불안하게 느껴져 뒤쫓으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우연을 가장하기엔 포차에서 거리가 너무 멀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 보내기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소소한은 자꾸만 차주혜를 보고 예쁘다 예쁘다 했지만 민우에겐 은영이 젤 예뻤다. 저렇게 어여쁜 은영이 혼자서 밤거리를 누비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불을 보고 정신없이 달려들 나방 같은 놈들이 사방에 널려 있을 터였다.
치근대는 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라도 민우가 곁에 있어 줘야 했다.
그런데 어딜 저렇게 가는 거지? 그녀는 멈출 줄 모르고 점점 멀어져 갔다.
안 되겠다. 은영이 이상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민우의 발은 은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면서 민우는 그녀가 버스킹 장소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기타 소리가 점점 커졌고 기타와 어울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옛사랑’의 서정적 가사가 밤하늘을 적시며 울려 퍼졌고 은영의 뒷모습에 어느덧 생기가 돌았다.
음악만큼 금세 마음의 색깔을 바꿔주는 게 어디 또 있을까. 민우의 어지러웠던 심정도 가라앉았다.
은영은 오래전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입사 후 첫 패소로 실의에 빠졌을 때 은영이 민우에게 음반 하나를 건넨 적이 있다. 아무 말 없이…….
집에 와서 포장을 풀어보니 나탈리 콜의 <Stardust> 앨범이었다. 민우는 그날 밤 앨범에 수록된 곡을 듣다가 곤히 잠들 수 있었고 그 뒤 민우의 방은 때때로 나탈리 콜의 음성으로 채워지곤 했다.
민우는 수록곡 중에서 What A Difference A Day Made를 가장 좋아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달라진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재즈에 심취했었다. 송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음악을 통해 해결했다. 아마 은영도 그랬으리라.
민우는 자신이 무대의 남자처럼 노래를 잘 부른다면 어떨까 상상해 봤다.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는 동안 노래가 끝났고 남자가 다음 곡을 시작하려고 폼을 잡았다. 트럼펫 전주가 흥겨웠다. 멀찍이 뒤에 서 있던 민우도 두둠칫 박자에 맞춰 살짝살짝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어! 어?
인파에 밀려 은영이 비틀거렸다. 그만 발을 헛디딘 것처럼 보였다.
민우는 한달음에 그녀를 향해 뛰었고 엉겁결에 은영의 어깨를 잡았다.
은영의 머리가 민우의 가슴에 와닿았다.
쿵!
지구에 운석이 떨어지는 충격이었다.
순간 쿵 쿵 쿵. 가슴이 촐싹거리며 난동을 부렸다.
은영이 민우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빛에 안도감과 수줍음이 뒤섞여 있었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렸다.
민우는 막 아찔한 삶의 한 토막을 건너고 있었다.
***
지아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아~~ 민우였다.
두근두근.
어찌나 심장이 크게 뛰는지 부끄러웠다. 민우의 체취에 숨이 가빠졌다. 지아는 주책바가지 마음을 숨기느라 어쩔 줄 몰랐다.
지아는 당황했지만 민우는 덤덤해 보였다. 지아를 세워주고서 곧바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을 수습하고 노래에 집중한 그를 한 번 더 올려다보는데 Macky is back!!!!! 하며 노래가 끝나버렸다.
박수와 함성,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곧이어 사람들이 앙코르를 외쳤다.
“네~ 네~ 감사드립니다. 네네~ 이렇게 성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밤이 제법 깊었으니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네요. 여러분께 보답하는 의미에서 마지막 신청 곡 딱 하나만 받겠습니다.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쳐주시는 분의 신청 곡을 불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하나, 둘, 셋 하면 바로 외쳐주세요.
자.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지아가 반사적으로 “플라이 미 투 더 문!!”하고 외쳤다. 앗. 그런데 웬걸. 민우가 동시에 같은 곡을 외쳤던 것이다.
이런.
몰라 몰라.
지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 저기 뒤쪽에 커플로 보이는 두 분이 강하게 ‘플라이 미 투 더 문’을 부르짖고 계시네요. 저도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노래라 이 곡을 끝으로 오늘의 공연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싱어의 농담에 지아는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드디어 훈구 사건의 변론기일이었다. 지아는 단정한 복장을 차려입고 지하철 3호선을 탔다. 양재역에서 내려 행정법원으로 향하는데 몸이 가뿐하고 하늘도 쾌청했다. 아무래도 사건이 잘 풀릴 것만 같았다.
지아는 자신감 넘치게 처음 방문한 법정의 문을 열었다.
짜잔~~ 하고 들어서는데 어째, 분위기가 싸했다.
양측 대리인이 핏대를 세우며 한창 갑론을박 중이었고 법대에 앉은 판사 세 명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재판장이 몇 차례 양쪽을 제지했고 어찌어찌하다가 다음 기일을 정하고 대리인들이 나갔다.
“2024구합 87182호 재결 취소 사건 원고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KNG의 김은영 변호사님 출석했습니까?”
재판장이 훈구 사건의 출석을 확인했다.
“네.”
지아가 얼른 대답했다.
“피고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다정의 엄근진 변호사님 출석했습니까?”
“네.”
재판장이 소장을 훑어보면서 말했다.
“원고는 피고 ○○교육청 행정심판위원회가 학급교체처분을 전학처분으로 변경한 재결의 취소를 구하고 있네요. 전학처분이 재량권을 일탈· 남용했다는 주장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시면 피고가 전학 처분의 근거로 삼은 사유가 일부 부존재하며 피해학생과 합의도 마쳤기에 학교폭력 가해학생 조치별 세부기준의 적용에 있어서 오류가 있습니다.”
지아가 여기까지 설명하고 있는데 엄근진 변호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공격적인 투로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는 가담 정도나 의도에 대해 다투고 있으나 이미 인정된 사실만으로 가해행위가 매우 심각하고 지속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반성의 진정성을 찾아볼 여지가 전무합니다. 원고는 단지 보호처분을 경하게 받을 목적으로 피해학생과 합의를 시도한 것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행정처분의 위법 여부는 행정처분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므로 피고가 재량권을 일탈· 남용했다는 원고 대리인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