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근진 변호사는 지아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말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나왔냐며 비웃었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못 박기 위해 설명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원고대리인은 대법원 판례를 간과한 채 변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행정처분 후의 사정 변화는 처분의 위법성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원고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처분 당시에 적법했던 이 사건 처분을 소송에서 위법하다며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엄근진 변호사가 의기양양하게 말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법정 안이 술렁였다.
“뭐야. 뭐야. 변호사가 합의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 이러다 소송 지는 거 아냐?”
“내 말이…….”
“그러니까 내가 변호사를 바꾸라고 했잖아.”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지아는 괜스레 뒤통수가 따가웠다.
재판장이 방청석을 향해 물었다.
“거기, 뒤에 누구십니까?”
재판장의 날카로운 지적에 엄근진 변호사와 지아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재판장의 시선은 방청석 첫 줄에 닿아있었고 그곳엔 훈구 엄마, 그리고 쌍둥이라 해도 믿을 만큼 그녀와 꼭 닮은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변론기일을 알려줬지만 참석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온다는 기별이 없었기에 마음 놓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둘은 비난의 눈초리로 지아를 노려보고 있었고 지아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어질어질했다.
엄근진 변호사가 인용했듯 반성의 여지가 없는 진술로 도배한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의 회의록, 지아와 면담할 때의 안하무인이었던 태도, 대표에게 심하게 항의했던 사정까지.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송무를 하게 된 이후 지아는 여러 소문을 듣곤 했다.
당사자가 법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하는 바람에 사건을 망쳤다거나, 난동을 부려서 화를 자초했다거나 하는 등등의…
어디서나 진상은 존재했고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었다.
‘설마 훈구 엄마가 그럴까?’ 했으나 이는 지아의 희망일 뿐. 지금까지의 모습을 고려할 때 그녀도 능히 소문의 주인공이 될 법한 성격이었고 판사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렇다고 재판장의 눈에 띈 의뢰인을 계속 방청석에 앉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어쩐다?
지아의 오만가지 생각을 비집고 카랑카랑한 훈구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훈구 엄마와 이모입니다.”
“훈구?”
판사가 되물었다.
지아가 부가 설명을 했다.
“재판장님. 저분은 원고의 법정대리인인 친권자 김미자 님이십니다.”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를 불러냈다.
“법정대리인. 할 말 있으시면 원고석에 나와서 진술하세요.”
판사의 말이 떨어지자 지아는 몹시 긴장했다. 예측 가능성의 경계를 넘나들던 훈구 엄마를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
다행히 그녀도 법정은 부담스러운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지아가 원고석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손발이 안 맞는 의뢰인이라도 함께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민우와 있을 때 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방청석에서 일어나 원고석으로 걸어오는 훈구 엄마를 가벼운 미소로 맞이했다. 그리고 법대를 향해 공손한 자세로 다시 변론을 시작했다.
“재판장님. 피고 대리인의 말처럼 현재 대법원 판례는 위법성 여부를 처분이 있을 때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하는 순간, 옆에서 훈구 엄마가 “내 이럴 줄 알았지”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불신과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였다. 변호사에게 타격을 안겨주기에 안성맞춤인 바로 그 반응이었다. 순식간에 지아는 집중력이 흐트러져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법원이 지금처럼 처분의 사후 심사기능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처분에 계속적인 효력을 부여할 것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으며… 학계에서는 여전히 판결시 기준설이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고…… 그 밖에… 행위시법주의를 취하고 있는 형법의 경우에도 범행 후의 정황을 양형에서 참작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
진땀을 흘리며 더듬더듬하는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듣다못해 재판장이 끼어들었다.
“지금 여기가 원고대리인의 강의를 듣자고 모인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게다가 법원이 행정권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범죄 처벌의 양형 조건과 같은 선상에서 고려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김은영 변호사님??”하며 이제 그만하라는 뉘앙스로 이름을 불렀다.
겨우 붙들고 있던 멘탈이 판사의 한마디에 바사삭 무너져 내리는 찰나, 익숙한 노랫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Think of me, think of me fondly
When we've said goodbye~~~
Remember me, once in a while
Please promise me you'll try~~~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이 불렀던 노래, 크리스틴이 성공적으로 오페라에 데뷔하게 되는 장면에서 나오는 곡이었다.
“이런. 법정에서는 모두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해주세요.”
재판장의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가 잔뜩 묻어났다.
방청석 구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아 벨 소리를 무음으로 바꾸는 동안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다.
When you find that once again you long
To take your heart back and be free
If you ever find a moment
Spare a thought for me
“전화기를 좀 꺼주시죠.”
짜증이 난 재판장이 한 번 더 말했다.
이 곤란한 상황이 반가운 유일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지아였다.
마음이 활짝 열렸고 순간이동 하듯 과거를 더듬었다. 자신이 크리스틴의 노래를 불렀던 때로…….
지아는 Think Of Me를 수백 번도 더 연습했었다. 그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게 된 날 크리스틴 역을 따냈고 동시에 뮤지컬계의 스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처음엔 주저주저하던 크리스틴이 평정심을 찾고 엄청난 가창력을 보여주는 장면은 지아가 뮤지컬 배우로서 성장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독창을 끝내고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 서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브라바!! 브라바!!
붕괴 중이던 지아의 멘탈이 법정이 혼란한 틈을 타 빠르게 복구되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 대리인이 제시하고 있는 판례는 취소소송에 한정된 것입니다. 행정소송 중에서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과 당사자 소송에 있어서는 대법원도 판결시를 기준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사건과 같은 취소소송에서 대법원이 처분시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연유는 개인의 권익구제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취소소송이라는 이유로 일괄하여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본 사건은 미성년자인 원고의 교육환경에 중대한 제약이 되는 전학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고에게 침익적인 행정처분을 취소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처분 이후의 사정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법원이 행정기관의 처분에 대한 사후 심사기능만 수행한다면 계속적으로 유효할 가치가 없는 처분이 사법부에 의해 승인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아가 또박또박 자신 있게 말하자 재판장의 표정이 한층 너그러워졌다.
이를 눈치챈 엄근진 변호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말했다.
“재판장님. 지금 원고대리인은 판례 변경을 해달라는 억지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피고 대리인. 자중하시지요. 원고 대리인의 변론을 조금 더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재판장이 엄근진 변호사를 제지하자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아는 크리스틴이 평정심을 찾고 노래에 몰입했던 것처럼 용기를 내 헝클어진 논리의 수습에 나섰다.
“무엇보다 피고 대리인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정은 법원이 사실심 변론 종결 당시까지 제출된 모든 자료를 종합하여 처분 당시 존재하였던 객관적 사실을 확정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행정청이 재결처분할 당시에 파악하지 못했던 사정을 피해 학생이 제출한 진술서를 근거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행정청은 원고가 폭행 수단으로 골프채를 제공했다고 판단했지만 사실 골프채는 현준이가 원고의 허락 없이 폭행 현장에 들고 온 것입니다. 피해 학생은 리더 격인 현준이에게 보복받을 것이 두려워 허위진술을 하였습니다.
둘째, 이 사건 학교폭력은 원고의 폭력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해 학생이 원고에게 빌린 돈을 몰래 도박자금으로 사용한 탓이 큽니다.
피해 학생은 도박을 말리는 원고에게 이자를 쳐서 갚겠다며 큰소리쳤으나 갚지 못했습니다. 각서를 쓰는 과정에서도 원고의 강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피해 학생이 도박죄로 처벌받을까 봐 겁이 나서 지금껏 이를 숨겨왔을 뿐입니다.
셋째, 원고가 계획적으로 아이들을 모아 피해 학생을 집단으로 폭행했다는 행정청의 판단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상은 원고와 피해 학생이 다투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아이들이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급격하게 사건으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끝으로 피해 학생은 절친한 사이였던 원고에게 화가 나서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과장했다고 합니다.
이후 반복해서 영웅 놀이를 일삼던 현준이가 재범으로 소년분류심사원에 위탁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허위진술에 가책을 느꼈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재결은 가해 학생에 대한 선도와 교육을 고려하여 단계적인 징계를 규정해 놓은 학교폭력예방법의 취지를 몰각한 처사입니다.
피고는 원고의 평소 태도와 선도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건의 전후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단번에 전학을 선택하였습니다.
원고는 인격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의 미성년자입니다. 감정을 통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할 능력이 부족합니다.
때론 무모하고 때론 어리석으며 또래에게 쉽게 휘둘리고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독립적인 성인이 되기 위해선 여러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는 시기입니다.
심지어 요즘 청소년들은 온라인 오프라인 두 왕국을 오가며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온라인 세상의 관계망에서는 오프라인의 부모와 선생님처럼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가이드라인을 지도해 줄 만한 존재가 부재합니다.
이러한 제반 사정을 살펴볼 때, 원고가 기존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존중과 배려를 학습해 나가는 것이 절실합니다.
그러므로 원고가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비례의 원칙을 위반한 피고의 재결을 취소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