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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ug 14. 2024

설렘 주의보


 브라바!! 환호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변론을 마치자 재판장이 물었다.     


 “원·피고 더 주장할 사항이 있습니까?”     


 지아는 할 말을 다 했으니 여한이 없었다. 옆자리를 살피는데 훈구 엄마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아가 재판장에게 없다고 대답했고 곧이어 엄진근 변호사도 “없습니다” 했다.    

  

 “그럼 변론을 종결하겠습니다. 선고기일은 4주 후 28일 오전 10시입니다.”     


 지아는 선고일을 수첩에 받아 적고 법정을 나왔다.


 뒤따라온 훈구 엄마와 이모에게 간단히 목례를 한 후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사건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을 알려주거나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진 않았다.  

    

 제한적 접촉. 그것이 불편한 의뢰인을 견디는 최상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훈구 엄마가 “김은영 변호사님~”하며 불렀다.      


 의외였다. 예의를 갖춘 목소리였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아가 돌아봤다.    

  

 훈구 엄마가 쭈뼛대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네.”


 난데없는 인사에 당황했다. 지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좀 전처럼 목례만 건네고 그곳을 떠났다.   

   

 어쩌면 훈구 엄마는 눈치챘을지 모른다. 언 땅이 봄볕에 녹아내리듯 나른하게 이완되고 있는 지아의 뒷모습을.     


***      


 그날 저녁. 거실 청소를 하며 지아가 ‘Fly Me To The Moon’을 흥얼거렸다.      


 ‘나를 달에 데려다주세요 별들 사이에서 즐겁게 목성과 화성의 봄을 볼 수 있게요 말하자면 내 손을 잡아달라는 거지요 말하자면…’ 하는데 수민이 다가와서 물었다.      


 “너 기분 좋아 보인다. 뭐, 좋은 일 있어? 훈구 사건 잘 된 거야?”      


 지아는 “어? 응”하고선 싱긋 웃었다.     


 훈구 사건의 예감이 좋은 것은 맞다. 하지만 지아는 수민과는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주 내내 지아를 들뜨게 했던 며칠 전의 밤거리. 버스킹을 본 바로 그 거리 말이다.      


 공연이 끝나고 멜로디로 채워졌던 광장에 밤의 고요가 내려앉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처럼 지아와 민우도 자리를 옮겼다.      


 포차로 돌아가는 길.     


 민우가 걱정 섞인 눈빛으로 물었다.     

 

 “변호사님. 아까 삐끗하신 것 같았는데, 다리는 괜찮으세요?”

 “아. 덕분에…”


 대답하다 문득 민우의 탄탄한 가슴이 상기되어 지아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정말 괜찮아요?”

 못 믿겠다는 듯 민우가 재차 확인했다.   

   

 “으음~~ 멀쩡해요.”

 지아는 무사하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바닥에 콩콩 발을 굴렀다. 불순한 상상이 불러일으킨 부끄러움을 떨쳐내려는 의도도 한몫했다.     


 “아~ 다행이다.”

 이를 본 민우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사거리에 멈춰 서서 포차 쪽이 아닌 다른 길을 가리켰다.      


 “저… 변호사님… 그럼 조금 걸어도 될까요?”   

  

 지아는 민우의 제안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술자리는 어떻게 되었냐?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느냐? 어찌 나를 발견할 수 있었냐?’      


 이것저것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모두 꿀꺽 삼켜버리고 고개만 끄덕였다.    

  

 민우와 지아가 접어든 길은 한적했다. 까맣게 익은 이팝나무 열매, 가로수 아래 심어진 코스모스, 모습을 감춘 채 찌르르 우는 풀벌레. 가을 냄새가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곳이었다.      


 가깝게 걷다가 어깨가 살짝 부딪혔다. 둘 다 모른 척하며 가다가 한번은 손등도 스쳤다.     

 

 그렇게 어둑한 길을 걷고 있자니 몰래 데이트하는 연인을 연상하게 되었다. 혼자 은밀한 감상에 젖었던 지아가 쑥스러워져 버스킹의 마지막 곡을 조그맣게 허밍 했다.


 지아의 허밍을 듣자 민우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정말 신기해요. 변호사님도 같은 노래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 그러게요. 나도 깜짝 놀랐지 뭐예요. 정변이 같은 곡을 신청할 줄이야.”


 지아가 허밍을 이어갔고 민우도 낮게 따라 불렀다.      


 그러다 민우가 물었다.      


 “이거 연말공연 때 부를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아가 웃기 시작했는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중엔 허리가 휘도록 배꼽을 잡았다.      


 민우는 박자를 잘 맞추는 편이지만 음정이 엉망이었다. 누군가 옆에서 둘의 노래를 들었다면 지아와 민우가 전혀 다른 곡을 부른다고 착각할 터였다.      


 대체 뭘 부르는지 파악이 곤란할 지경이었으니……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우와. 그래도 그렇지. 변호사님! 그렇게 웃으시면 어떡해요?”


 민우가 지아를 책망했다.      


 무안했을 그에게 미안해서 웃음이 뚝 끊어졌다. 놀랄 만큼 침착해진 지아에게 민우가 한마디 던졌다.


 “정녕, 이 노래로는 안 될까요?”하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지아에게 전염된 사람처럼 깔깔거렸다.


 “아. 뭐야. 깜짝 놀랐잖아요.”      


 지아의 커진 눈을 본 민우는 더욱 장난기가 발동해 애처로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그 바람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완전히 풀렸다.      


 “아. 미얀 미얀. 하지만 정변은, 노래는 좀, 곤란해요.”

 지아가 손사래를 쳤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우리.”     


 우리? 우리라고?     


 주책바가지 심장이 다시 요동쳤다. 싱어가 커플이라고 칭했을 때 보다 한층 더 많이…  

   

 “잠깐 기 앉았다 갈까요? 공연을 어떻게 할지 생각도 할 겸.”


 지아가 길가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민우도 곁에 앉았다.      


 쏴아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꽃잎이 팔랑거렸고 지아의 머리칼도 찰랑찰랑 가볍게 흔들렸다. 지아가 벤치 아래 보도블록 틈새로 자라난 코스모스를 들여다봤다.      


 희미한 보랏빛이 도시의 별빛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민우가 “춥지요?” 하면서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아. 이것은?? 뒤의 스토리가 뻔히 보이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잖아.     


 자연스러운 예상이 가능한데도 주춤주춤 움직이는 민우의 손놀림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지아는 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있었다. 민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망설임이 느껴졌다.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     


 “어? 정변? 여기 있었네?”     


 하필 이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방해꾼.     


 소소한이 불쑥 나타났다. 정지한 시간이 다시 흘렀다.     


 “한참 찾았잖아. 그런데 여기서 두 분 뭐 하고 있었어요?”


 꼬인 혀로 반말과 높임말을 오가며 소소한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주고받을 타이밍이 분명했는데……


 기대가 좌절된 자리에 깊은 아쉬움이 들어섰다.      


 지아는 듣고 싶은 말이 생겨버렸던 것이다.     


 저 멀리서 Fly Me To The Moon의 후렴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달리 말해 난 당신을……   


 허전한 가슴을 채워줄 노래를 영원히 듣고 싶었다.     


***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가을 소나기라니. 그치고 나면 엄청 추워질 텐데.”

수민이 창밖을 내다보며 구시렁거렸다.      


“왜? 비가 싫어?”


“그게 아니라 우리 오늘 걍 발레 째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뒹구는 건 어떨까? 주말은 주말답게 보내자는 말이지.”


“뭐래? 발레 하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벌써 시들해진 거야?”     


뭐든 시작을 잘하지만 지구력은 떨어지는 수민이었다.      


“아니~~이. 그건 아니고, 발레가 너무 어려워서 그러지. 넌 맨날 선생님께 칭찬 들으니까 내 맘을 모를 거다.”


“칭찬은 무슨. 지적만 당하고 있구먼.”     


“아냐. 너에 대한 선생님의 기대가 대단하시던걸. 오죽하면 벌써부터 아마추어 콩쿠르에 내보내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겠냐?      


그러고 보니 너! 혹시, 발레 천재였냐? 난 어려운 자세가 넌 왜 그렇게 쉽지? 남보다 너무 빨리 늘고 신기하잖아~ 아무래도 너 적성을 잘못 찾아서 살아온 거 아닐까? 어릴 때부터 발레 했으면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될 자질을 지금껏 썩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 아깝다. 은영. 발레리나 친구가 생길 수 있었는데… 그런데 말이야. 나처럼 자존감 쩌는 인간 아니면 너랑 친구도 못 해 먹겠다. 안 그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될 게 뻔하잖아. 넌. 뭐, 사람이. 그러면 못써! 도대체 못 하는 게 없잖아?”     


 수민은 짜증을 내는 건지, 자신의 훌륭한 인품을 과시하는 건지, 은영을 친구로 둔 것이 자랑스러운 건지, 헷갈리게 계속 종알댔다.      


 그러는 동안 지아는 ‘어릴 때부터 발레를 해왔으나 중도에 포기했다. 우리 엄마는 지금 선생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어’하며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꾹 참았다. 자신을 재촉하던 엄마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던 것이다.      


 대신 ‘발레는 타고난 재능보다 열심히 하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해주려다 그만두고 수민을 움직이게 할 다른 공략을 펼쳤다.    

 

 “수민. 그 뱃살은 어쩔 건데? 안 그래도 바빠서 자주 못 갔잖아. 술은 안 빠지고 마시면서 수업은 왜 자꾸 빠지려 해? 오래, 지속적으로, 많이 알코올을 흡수하겠다는 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그만 칭얼대고 일어나. 어여 나가자.”


 “지독한 것. 넌 어째 날씨도 안타냐?”     


 일에 치여 한동안 학원에 갈 수 없었다. 하루만 빠져도 표가 나는데 못 간 지 일주일이 넘었다. 그러다 보면 발레는 영영 못 하게 될 것이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못 이기는 척 수민도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고 지아와 함께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섰다. 크고 검은 우산을 펼치는데 투둑투둑, 우산 위로 빗줄기가 무겁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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