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지나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천둥 번개가 번갈아 하늘을 찢어놓더니 물 폭탄이 떨어졌다.
금세 발뿐 아니라 허벅지까지 젖었다. 옷이 몸에 휘감겨 움직이는 게 불편했다. 수민의 말처럼 집에서 소파와 한 몸이나 될 걸 그랬다. 괜히 발레 하러 나왔나 싶었다.
배수로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빗물이 도로 위에서 갈 길을 잃고 수민과 지아처럼 방황했다.
“요즘 비는 왜 이러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네.”
“그러게. 오도 가도 못하겠다.”
몇몇이 공원 정자 아래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우리도 저기서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까?”
“그렇지? 이대로는 못 가겠지?.”
도저히 학원까지 걸어갈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둘은 정자 안에서 끝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 친구. 지각인데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까?”
시간을 확인하고 머쓱해진 지아가 물었다.
“노노노. 그럴 순 없지. 기왕 나온 김에 학원 가서 10분이라도 스트레칭하고 오자.”
막상 집을 나선 수민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여하튼 출석하겠다고 수민이 굳은 의지를 내비치자 때맞춰 비가 잦아들었다. 신기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정없던 비가 뚝 그쳐 버렸다.
스콜도 아니고. 이건 뭐.
이곳이 서울 시내 한복판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기후였다. 어쨌거나 비가 그쳤으니 물이 괸 운동화를 끌고 학원으로 향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질퍽거려 불쾌지수가 올라갔다.
학원 건물 1층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업 시간에 40분이나 늦었다.
대개의 수업과 마찬가지로 발레 수업도 조금 일찍 가서 몸을 풀면서 준비하는 것이 관례다.
도중에 들어가면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게 되고 지각생 본인은 조급한 마음에 부상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각하게 지각했는데… 어쩌지? 수업 들어가는 게 더 이상하겠다. 그냥 미용실에서 머리 좀 다듬고 돌아갈까?"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지아가 한 번 더 수민을 꼬드겼다.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수민이 대기자가 바글바글한 미용실 안을 가리켰다.
“그럼 커피만 마시고 돌아갈까?”
“커피숍도 만원인데?”
커피숍에도 비를 피하려고 몰려든 사람으로 붐볐다.
“천재지변이잖아. 늦었지만 선생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그래. 뭐. 비를 뚫고 여기까지 왔으니 몸이라도 풀고 가자.”
지아도 달리 방법이 없어 수긍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3층에 도착해 학원 문을 열려는데 창밖에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이 하늘이 완전히 개였던 것이다.
“이거야 원. 완전 미친 날씨잖아.”하면서 지아가 출입문을 열었다.
학원 안은 여느 때와 같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잔잔한 리듬과 간간이 들려오는 선생님의 구령에 마치 밖의 변화와는 무관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둘은 재빨리 탈의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손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았다.
이후 수민은 선물 받았던 민트색 레오타드에 흰 스커트를, 지아는 사이즈 오류로 몇 번에 걸쳐서 간신히 구매에 성공한(은영은 지아보다 두 치수 가슴이 컸다) 인디 핑크 레오타드에 그레이 스커트를 입었다.
복장을 갖추고 프런트가 있는 복도를 지나 연습실에 들어서려다 말고, 둘은 그대로 입구에 서서 멈춰버렸다.
짜잔~~ 그곳엔 발레선생님과 비슷한 경지로 앙셴망(강사가 레슨 때 몇 가지 동작을 연결해 만드는 짧은 안무)을 구사하고 있는 멋진 발레리노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막 아다지오(느린 템포 음악에 맞춰 천천히 큰 동작으로 추는 앙셴망)를 마치고 회전 기술인 피루엣을 시작했다. 몇 바퀴씩 돌 때마다 짧고 고운 머리카락이 환상적으로 날렸다.
게다가 알레그로(점프 동작을 중심으로 빠른 템포에 맞춰 경쾌하게 추는 앙셴망)가 이어질 동안은 도무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름다운 비율의 육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그 모습이 압도적이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했다. 환생한 아폴로를 마주한다면 이럴까.
수민이 갈망해 마지않던 우아함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음악이 뚝 끊어졌다.
“그게 아니지~~”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점프가 왜 그 모양이야? 한쪽 엉덩이만 올라갔잖아. 자세 똑바로 하고, 시선 처리 정확하게, 한 번 더!”
평소 수업과는 다르게 엄한 말투였다. 그제야 넋 놓고 있던 지아와 수민이 정신을 차렸다.
어찌하여 선생님은 아폴로를 나무라고 있는가.
의아해서 방금까지 공중을 날아다니던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그런데! 놀랍게도 땀범벅이 된 아폴로는 바로 민우였다.
인기척에 둘을 알아본 선생님이 말했다.
“죄송해요. 오늘 아무도 오지 않아서 오빠랑 연습하고 있었어요.”
“오… 오… 빠?”
지아는 어버버해져서 민우와 선생님을 번갈아 쳐다봤다.
***
사정은 이랬다.
폭우가 쏟아져서인지 오전 수업 시간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옆 사무실과의 소음 문제를 해결하러 온 선생님의 오빠, 즉 민우가 분쟁을 정리하고 돌아가려다 빈 연습실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선생님과 단둘이 수업을 시작했다는… 것이 지아와 수민이 목격한 사태의 전말이었다.
“정변이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지 뭐예요?”
수민이 감탄하며 말했다.
“아. 오빠와 저는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웠어요. 저는 수민님과 은영님이 오빠와 같이 일한다는 게 더 놀라워요.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같이 수업할까요?”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수업이 2시간 후에야 끝났다. 다음 시간까지 수강생들이 결석하는 바람에 그리되었다.
넷은 모두 땀에 홀딱 젖은 꼴이었고 지아는 얼떨결에 함께 한 수업으로 민우와의 거리가 한층 줄어든 것 같았다.
동병상련한 사이에 생기는 동지애(?)를 느꼈달까.
“우와~~~ 정변. 이렇게 멋진 퍼포먼스라니.”
“최고였어요. 정말.”
지아와 수민이 아낌없이 칭찬했다.
“제가 수업을 헐렁하게 했나 봐요?”
그 와중에 한눈팔 여력이 있었냐며, 앞으로 좀 더 강도를 높여야겠다고 선생님이 선언했다.
“말도 안 돼요. 선생님. 지금도 죽을 것 같은데… 우리 미워하시는 거죠?”
“그럴리가요.”
부인했지만 선생님의 말엔 진정성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유쾌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창밖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다시 비가 오려나?”
순간적으로 창밖을 바라보다 지아의 머릿속에 유레카, 하고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정변. 우리 연말에 발레 공연 어때요?”
***
민우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뭐든 척척척 알아서 하고, 부탁할 겨를도 없이 지아의 필요를 챙겨줬던 그였다.
그런데 발레 공연하자는 말에 보인 반응은…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 싶었다. ‘우리’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막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던 그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민우가 먼저 가버리자 선생님이 말했다.
“오빠가 좀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래요. 은영님이 좀 이해해 주세요.”
“어떤??”
지아의 물음이 자못 진지해 보였는지 선생님이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지아와 수민은 상담실에 모여 따뜻한 차를 얻어 마시며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마도 제가 초등 3학년, 오빠가 5학년이었던 같아요. 가을 운동회 때 오빠와 함께 학교 강당에서 파드되(2인무)를 한 적이 있어요. 몇 달을 연습해서 선보인 자리였지요.
우리는 꼬꼬마 때부터 같이 발레를 했거든요. 그걸 아셨던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무대에 섰던 거예요. 그때 정말 멋진 공연이었어요.”
선생님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그때 이후로 굉장히 인기가 많아졌어요.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저는 순식간에 공주님으로 신분이 탈바꿈했고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일곱 난쟁이를 거느리게 되었지요. 선생님께도 여러모로 특별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오빠는 상반된 반응을 받았어요. 운동, 공부, 외모. 모든 면에서 출중해 핵인싸였던 오빠가 계집애 같다는 놀림을 받기 시작했어요.
발레가 다분히 종교적, 정치적인 도구였고 남성 무용수가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턱이 없는 꼬마들의 장난이었지요. 12살짜리 꼬맹이들에게 어찌 발레의 기원 따위 습득하길 기대하겠어요?
여하튼 그 꼬리표가 졸업할 때까지 따라다녔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남자가 발레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 태권도가 대세였지요.
그러고 나서 오빠는 발레를 그만뒀어요. 사실 저보다 오빠가 더 잘했었는데… 중학교에 가더니 오빠는 농구에 빠져서 지내더라고요.
전 오빠가 더 이상 발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발레를 전공하고 무용수로 활동할 때도 전혀 관심 가지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제가 여기에 학원을 열고 나서야 알았어요. 오빠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요.
초기에 수강생이 없었던 탓도 있는데… 오빠가 종종 학원에 놀러 와서 함께 연습하고 호흡을 맞췄어요. 어릴 때처럼 말이죠.
오빠는 여전히 발레를 무척 좋아했어요. 어릴 때 일 때문에 공연에 대한 거부감은 좀 있겠지만.
은영님이 오빠를 설득한다면. 저는 대찬성이에요. 아무래도 무대에 서봐야 실력이 부쩍 늘거든요. 새로운 경험이 지난 기억을 덮어주기도 하고요.
뒤는 제가 책임질게요. 아마도 멋진 공연이 될 거예요. 은영님은 특훈에 들어가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선생님은 되려 지아의 실력을 걱정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이렇게 상세하게 이유를 들었는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도 안 됐다. 그가 발레 하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민우의 그랑 주테(공중에서 다리를 앞뒤 180도 펼치며 뛰어올랐다가 착지하는 동작)는… 정말이지, 너무 멋지잖아!!
***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지?
어이없게도 액정화면에 ‘민선혁’이라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헐~~ 여태 민선혁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니?!
그것도 미친놈이나 배신자가 아니라 떡하니 ‘민선혁’이라는 단어로.
당황한 지아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받기’를 눌러버렸다.
전화기 너머로 민선혁의 씩씩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너.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네가 전화한 게 어이없어서 그런다. 왜?”
- 일단 내려와.
“어딜?”
- 로비.
“네가 뭔데 오라 가라야?”
- 너 찾는 사람이 있어.
“그럼 사무실로 안내 좀 해주면 안 되냐?”
- 야. 뭐. 말이 통해야 안내하든 말든 하지? 빨랑 내려오기나 해.”
하고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뭐야? 저 자식은? 매번 저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