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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04. 2024

쉘 위 댄스?

 박 차장이 복사해 준 마리오의 기록을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수민이 지아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은영. 뭐 하냐?”

 책상 앞까지 바싹 다가와 어지러운 서류를 내려다보며 수민이 말을 붙인다.     


 “어? 왔어? 오늘 한가해?”

 한창 바쁠 시간에 웬일인가 싶어서 지아가 물었다.      


 “아니. 그냥. 재판 갔다가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수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글쎄~ 1심에서 무죄였던 사건을 항소심 첫 공판 기일에 재판장이 죄를 시인하라는 거야. 인정하면 선처해 주겠다면서. 이게 말이 돼? 얼마나 고생해서 받아낸 무죄인데… ”     


 “헐~~ 어이가 없네. 말도 안 돼.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그럴 수 없다면서 뻗대다 왔지.”    

 

 “잘했다. 잘했어. 힘들었겠다.”

 “어휴. 세상이 온통 지뢰밭 같아. 판사가 그러니까 의뢰인이 불안해해서 아주 혼났어. 그건 그렇고 너도 뭔 일 있어? 왜 그렇게 다운되어 보이냐?”

 지아에게 넋두리한 걸로 이내 기분이 풀어진 수민이 물었다.     


 “새로 맡은 사건이 말이야… 비슷한 판례가 있나 찾아보고 있는데 거의 다 유죄를 받았지 뭐야. 그 이유가 뭘까 싶어서… 고민 중이었어.”

  “그래? 어떤 사건인데?”      


 “우리 의뢰인이 좋아하던 여자의 부탁으로 누군가의 돈을 대신 받아주었어. 그런데 그 누군가가 보이스피싱의 피해자였던 거지. 그 때문에 보이스피싱 공동정범으로 기소된 사건이야. 의뢰인은 우리나라에 유학 온 이탈리아인이고…”

 “혹시 소문의 그 꽃미남? 디카프리오와 현빈의 상위호환?”   

  

 “누가 그래?”

 “소문이 자자하던걸. 엄청난 미남이 너를 찾아왔다고. 그런데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데?”


 “내가 보기엔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 같아. 유학 생활이 녹록지 않잖아. 아무래도 외국 생활이 외로워서 이성을 사귀려다 범죄자들과 얽힌 것 같아.”

 “어째~~ 안 됐다. 뭐 유리한 증거가 없을까?”     


 “그간에 여자와 주고받았던 메시지뿐인데 그게 통째로 삭제되었데.”

 “어쩌다가?”     


 “휴대폰을 만지다가 뭔가 잘못 눌렀다던데…”

 “그게 말이 돼? 좀 찝찝하지 않아?”     


 “아마도… 그래서 기소가 됐겠지? 하지만 의뢰인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 복구하려고 업체에 맡기기도 했고 나름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을 기울였더라고.  

    

몇 개 남아있는 메시지를 살펴보면 그간의 사정을 추론할 수는 있어. 적어도 변호인의 시점에서는 말이지. 문제는 사건의 실체를 밝혀줄 만큼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는 거야.      


제삼자 입장에서 무죄라고 볼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러기엔 너무 애매해.”     


 “아~~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그렇게 중요하게 배웠건만. 실무에 나와서는 유죄 추정을 깨기 위해 이렇게 머리 싸매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겠냐?”     


 수민이 제 일처럼 한탄해 준다. 지아는 맞장구치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런 순간이 참 좋았다.     


 그러다 문득 아. 맞다, 하고선 수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뭐 쌈빡한 생각이라도 있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걸까. 지아가 기대에 차서 물었다.     


 그러나 수민의 이어진 말은 소송과는 무관했다. 역시 일보단 가십이 더 재미있는 법이다.      


 “네가 그렇게 이탈리아어를 잘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민선혁 코를 납작하게 눌러줬다며! 오올~~ 간만에 속이 다 시원했어. 그런데… 어찌 된 일이야? 너 언제 나 몰래 이탈리아어를 배웠어?”     

 “에이~~ 뭐래? 당연히 번역 앱을 쓴 거지.”     


 지아가 적당히 둘러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될 수민의 궁금증을 일축하기 위해서였다.   

   

 몇 달간 수민과 같이 살면서 터득한 생존 전략이었다.      


 “문명의 이기였구나!”


 지아를 철석같이 믿고 신나 하는 수민을 보고 있자니 속이 뜨끔했다.      


 그렇다고 이태리 가곡을 배우면서 외국어와 친숙해졌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잠깐 이탈리아에서 살았다고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민이 재잘거리는 동안 지아는 먼 이국땅에서의 시간이 떠올라 상념에 잠겼다.     


 십 년 전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을 때 지아는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의 부재가 몰고 오는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이탈리아에 갔었다.      


 성악을 좀 더 공부하겠다며 핑계를 댔지만 실질은 도피성 유학이었다.     

 

 하지만 몇 달이 채 안 돼 지아는 고향이 그리웠다. 그것도 사무치게…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낯선 기후, 낯선 언어, 낯선 먹거리.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문화 속에서 지아는 외톨이였다.      


 그녀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선은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은근한 차별과 따돌림으로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대화 중 아리송한 농담과 뉘앙스를 이해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체류 목적이 단순 여행이 아닌 이상 외국에서의 생활은 낭만으로 점철될 리 없었다.      


 “아유.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     


 수민이 탁상용 시계를 쳐다봤다. 호기심, 공감, 통쾌의 대서사를 풀어놓다 최초의 분노를 잊어버리고 그저 시간을 뺏었다는 사실에 미안해한다.      


 “바쁜 것 같은데 어서 일해. 퇴근할 때 보자고.”


 서둘러 수민이 나가자 지아는 다시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새삼스레 마리오를 생각하면서…    

  

***     


 아무래도 마리오가 삼재에 든 것 같다. 아니지. 마리오는 별자리 운세 쪽인가.     


 어느 모로 따져 봐도 그의 대진 운은 ‘꽝’ 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건이 가차 없기로 유명한 재판부에 배당되었던 것이다.      


 지아는 기피 신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으나 꿀꺽 삼켜버리고 변호인 의견서 작성에 몰두했다. 법률상 기피의 원인이 없을뿐더러 악명을 이유로 불공평한 재판이 염려된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예감대로 공판에서 지아가 무죄를 주장하자 판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피고인은 범죄사실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그 위험을 용인할 의사도 없었습니다.    

  

특히 이 사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전화금융사기 조직원들과 순차적으로 공모하여 현금 수거책 역할을 한 공동정범이라는 것입니다.      


대법원 판시에 따르면 공동정범의 성립요건인 공동가공의 의사는 타인의 범행을 인식하면서도 이를 제지하지 아니하고 용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상호 이용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불법적인 행위나 범죄에 관련될 수 있다는 막연한 의식이나 예견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확정적 고의는 물론 미필적 고의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지아의 변호를 듣는 내내 판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내심의 의사를 피고인의 진술에 의존해서 판단할 수는 없었기에 피해자 셋과 마리오의 친구 길무득이 증인으로 채택되었다.   

   

 첫 번째 공판을 끝내고 법정을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마리오는 사태 파악을 전혀 못 하는 눈치였다.   

   

 지아가 들고 있는 기록이 무거워 보인다며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었다. 말간 얼굴로 보아 고의가 뭔지, 공동정범이 단독정범과 어떻게 다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재판이 끝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문에 도착해서 헤어지려는데 마리오가 이탈리아식 인사를 했다.     

 

 비쥬가 오랜만이라 살짝 놀랐지만 마리오의 마음을 생각해서 예의 바르게 응했다.   

   

 지아의 어깨에 가볍게 올렸던 손을 내려놓으며 마리오가 속삭였다. 

 “저는 변호사님만 믿어요.”     


 이런! 마리오가 아니라 지아가 삼재였던 것이다. 마리오는 지아의 가슴에 돌덩이 하나를 얹어놓고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뒤에서 지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변호사님~~”     


 요즘 이상하게 자주 마주치는 차주혜였다. 그녀는 쾌활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김변호사님~~ 왜 그렇게 힘없이 걸으세요? 남자친구도 생긴 것 같구먼.”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남자친구는 무슨…”

 “에이. 좀 전에 저, 변호사님과 그 이딸리아인…… 봤는데요.”

 “뭘?”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감고선 입술을 쭈욱 내밀며 쪽쪽 거렸다. 볼 키스를 두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의뢰인하고 무슨…”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저번에 봤을 때도 각별한 사이 같더구먼. 엄청 다정하던걸요.”     


 지아의 손사래를 무시하고 그녀는 이미 둘 사이를 단정 짓고 있었다.    

  

 ***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까칠한 판사, 해맑은 마리오, 마리오와 지아를 엮지 못해 안달인 주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지나치게 시달린 하루라 일찍 퇴근해 버릴까 고민도 됐다. 그런데 갑자기 민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지아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화가 난 얼굴로 눈앞에 서 있었다.    

 

 “해요. 해. 우리.”

 “??” 

 말문이 막혔다. 왜 화를 내는지,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민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제 말은… 함께 발레를 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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