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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ug 28. 2024

사랑이 뭐길래

 1층에 내려갔더니 로비가 시끌시끌했다. 건물 관리인과 경비원, 그리고 타 로펌의 변호사 몇이 모여있었다.      


 “김은영. 왜 이제야 내려와? 나 골탕 먹일 일 있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다가갔더니 민선혁이 지아에게 짜증을 쏟아붓는다.     

 

 기가 막힌 시선으로 민선혁을 쳐다보는데 그가 더욱 분을 내서 말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얘 좀 데려가라.”   

  

 얘라니? 누굴 말하는 건가?      


 그때 민선혁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이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Sono qui per parlare con il avvocato Kim Eun-young(김은영 변호사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제기랄.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김은영 불렀다니까. 아~놔. 아침부터 성가시게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지껄이고 있어.”      


 민선혁의 언성이 더욱 높아졌다.      


 아하.


 그제야 지아는 민선혁이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았다.    

  

 민선혁은 아마도 출근길에 이 청년과 마주쳤을 것이다. 하필 그가 외국인이었으므로 도움을 요청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알아들은 김은영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지아에게 전화했을 것이며 난처한 상황에서 화를 내는 버릇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저리 열불을 토하고 있었을 거였다.     


 게다가 평소 자신의 지성과 인품을 뽐내기 위해 말을 건네던 건물 관리인과 경비원이 지켜보는 자리였으니 속으론 더욱 긴장했을 터였다.      


 지아는 민선혁이 그들 앞에서 잘난척하느라 여념이 없던 모습을 종종 보아왔기에 그리 추측했다.

    

 필시 민선혁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급격히 짜증을 내고 있었으리라.      


 지아는 청년에게 성큼 다가섰다.      


 “Piacere! Sono Kim Eun-young, avvocato. Come si chiama?(만나서 반가워요! 변호사 김은영입니다. 이름이 뭐죠?)”      


 “Mi chiamo Mario. Sono venuto per una consulenza legale.(마리오예요. 법률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      


 “Sì, venga di qua(네, 이쪽으로 오세요).”


 순간 민선혁이 힐긋 주변을 돌아보더니 가까이 와 소리죽인 채 물었다.     


 “너. 뭐야? 저 인간이랑 말이 통해?”

 “응. 뭐. 왜?”     


 지아가 의아하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민선혁이 입을 앙다물었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흥분을 누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리오가 지아에게 물었다.      


 “김은영 변호사님. 몇 층으로 가면 될까요?”     

 마리오의 한국어는 제법 유창했다.      


 “아. 마리오. 9층이에요.”     

 지아는 마리오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아~~ 저 자식. 한국말을 할 줄 알았던 거야? 날 놀리고 있었던 거야? 이섹…”


 뒤에서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선혁은 마리오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리오가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험악한 욕설 뒷자락이 잘려 나가면서 엘리베이터 안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남겨졌다.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지아와 마리오가 마주 보고 앉았다.  

    

 이 외국인은 어떻게 은영을 알고 로펌까지 찾아왔을까.  

    

 지아가 호기심에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마리오가 지아의 궁금증을 눈치챘는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에 서류 하나를 받았습니다. 검찰청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던 중에 친구로부터 변호사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아. 네~~ 그렇습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친구분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무득입니다. 길무득.”


 “길무득?”     


 지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리오가 추가로 설명했다.     

 

 “아버님이 길제범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변호사님이 아버님 건물의 담장 사건을 해결해 주셨다고… 보험회사를 상대로 이겼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아. 건물 주차장에 무단 주차하면서 생겼던 사건 말씀하시는 거죠?”     


 “네. 능력 있는 변호사님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해서 찾아왔습니다.”


 난데없는 칭찬에 쑥스러워하는데 마리오가 가방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서류는 마리오의 범죄사실이 적혀있는 공소장이었다. 전화금융사기 조직의 현금 수거책 역할을 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연루되었나요?”     


 공소장의 두 번째 장을 넘기다 지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마리오는 이탈리아 국적의 학생으로 증조모가 한국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생이 되자 몇 차례 혼자서 여행을 왔다.      


 그에게 한국은 깨끗하고 안전하며 편리한 나라였다고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그는 여전히 한국을 잊을 수가 없었고 어쩌다 알게 된 한국 유학에 마음이 꽂혔다. 정보를 수집하고 열심히 준비한 끝에 그는 정부 초청 장학생이 되어 한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이에 작년에 우리나라에 입국했고 현재 J 대학원 경영학 석사과정 이수 중이며 길제범 씨의 아들 길무득과는 같은 대학원에 다니다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우리나라에 온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보이스피싱 건으로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사건의 시작은 연인이라 생각했던 K와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 오고 두어 달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온라인 데이팅 앱으로 K를 알게 되었어요. K는 은행에 근무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프로필 사진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호감이 갔습니다.      


메시지로 몇 번 연락을 취했는데 그녀는 매우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매일 메시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점점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K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면서 부탁을 해왔습니다.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싶었던 저에겐 좋은 소식이었지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 여차저차해서 ……”  

   

 지아는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니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단다.    

  

 그런데 그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형사재판을 받게 된 청년이라니.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처리한 고소 사건도 상황이 비슷했다. 그때도 일면식이 없는 여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미혼 남성이 카톡만 주고받던 여성에게 거금을 송금했다. 오천만 원이나.  

    

 단지 그녀와 잘 지내고 싶다는 이유로.     


 물론 그녀는 돈을 받자마자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던 오십 대의 한 여자가 미국 의사라 사칭한 어떤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일억 원이 넘는 돈을 송금해 준 사건도 있었다.      


 여자는 처음엔 자신의 예금을 보냈고, 다음엔 보험계약을 해지했으며 마지막엔 사채까지 동원해 돈을 마련하다가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놀라겠지만 의외로 이런 일이 흔하게 발생했다.     


 여기서 확인되는 공통점은 모두 상대의 목소리조차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연락을 주고받은 대상이 과연, 실제로, 이성이긴 했던 걸까.      


 지아의 눈엔 그저 외로움과 사랑에 취약한 사람을 골라 계획적으로 다가간 범죄조직으로만 보였다. 호감을 품었던 이성이었을 리가 없다. 그랬기에 더욱 화가 났다.      


 그러나 변호사는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선 안 된다. 지아는 일단 수사 기록을 열람한 후에 마리오와 다시 자세하게 상담하기로 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려다 문득 좀 전의 일이 생각나서 물었다.     


 “그런데. 마리오. 이렇게 한국어를 잘하는데 왜 로비에서는 이탈리아어를 하고 있었어요?”


 “아. 그거요?” 하더니 마리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마음이 급해 이탈리아어가 튀어나왔는데 민선혁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속된 말을 내뱉길래 골려주려고 계속 모른 척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김은영’은 또박또박 발음했다고.     


 참 나.


 동성을 대하는 스킬엔 저리 뛰어난 인간이 어찌 이성에겐 약했을까.      


 그러나 인간이 매력적인 이성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인류는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지아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마리오와 함께 1층에 내려갔다.      


 혹여 적대감을 드러내는 민선혁과 마리오가 또다시 마주칠까 봐 염려되어서였다. 이 또한 이성에게 약한 지아의 오지랖이었다.      


 “기록 검토 후에 연락드릴게요.”

 “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마리오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선 회전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지아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발걸음을 떼었다. 그 순간 누군가 친근하게 지아를 불렀다.      


 마침 건물 안으로 들어오던 차주혜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지아와 마리오가 인사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듯했다.      


 “김변호사님~~ 저 멋진 분은 누구예요? 어쩜 이목구비는 리즈 시절의 디카프리오인데 하드웨어는 현빈이로군요.”


 “아. 의뢰인이에요.”

 “어머 어머. 정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저런 의뢰인을 만날 수 있나요? 김변호사님은 참, 능력도 좋아.”


 차주혜가 민우에게만 하던 엄지척을 지아에게까지 내보이는데…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그 의도가 헷갈렸다.     


 과장된 몸짓이 부담스러워 그냥 무시하고 로비를 가로지르려다 말고 지아는 놀라서 멈춰 섰다.   

   

 건물 안의 모든 여자가 내려왔다 싶을 만큼 많은 여인이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차변. 오늘 무슨 날이에요? 여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요?”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세요? 좀 전에 나간 김변호사님의 의뢰인을 구경하러 나온 것 같은걸요.”    

 

 역시 매력적인 이성(異性) 앞에서 쉬이 이성(理性)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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