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Jul 10. 2024

숨겨진 감정

  지아가 법정을 나와 청사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길제범 씨가 맡긴 사건을 변론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떻게 반박할까. 지아는 원고 보험회사의 주장을 곰곰이 되새기며 걷고 있었다.      


 사건은 길제범 씨 소유의 건물 주차장에서 생겼다. 운전자는 인근 병원의 방문객으로 차를 세울 곳을 찾지 못해 건물 주차장에 들어섰다가 후진하면서 주차장 담벼락을 들이박았다. 그 때문에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하필 담장밖에 고가의 수입차 두 대가 세워져 있을 게 뭐람.      


 무너진 담장에 깔려 차량 두 대가 심하게 파손됐다. 이에 운전자의 보험자인 보험회사가 차주들에게 손해를 배상한 후 길제범 씨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더니. 황당했다.      


 물론 지아가 은영의 몸에 들어간 것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겠지만.      


 지아가 막 이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은영을 불렀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봤다. 이제 ‘은영’이라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지아는 그런 자신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민선혁이 뛰어오고 있었다. 옆구리에 두꺼운 기록 봉투를 끼고서 헐레벌떡. 게다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쟨 또 왜 저래? 어이가 없었다.      


 마주쳐 봐야 좋은 일이 하나도 없을 인간이 왜 저렇게 반가워하며 뛰어오지? 지아는 여전히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달갑지 않은 불안감을 뚫고 민선혁은 금방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더니 숨을 고르면서 물었다.    

  

 “야. 너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의뢰인이 대표님 방에 찾아와서 난동까지 부리냐? 네가 의뢰인에게 호통을 쳤다면서 회사에 소문이 쫘악 깔렸던데.”     


 그럼 그렇지. 그에게 좋은 의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어.”

 지아는 법원 앞마당에서 민선혁과 실랑이 벌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에둘러댔다.  


 그러나 민선혁은 여기서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던데. 너 때문에 고문 기업 하나 날린 판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되면 회사에 손해가 얼만 줄 알아?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걱정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민선혁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어쩐지 신나 보였다.      


 “나 곤란해졌다고 고소해하는 것 같다. 너!”

 “나, 날, 뭐, 뭘로 보고?”

 정곡이 찔렸는지 민선혁이 말을 더듬었다.   

  

 “널, 제대로 보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참견 말고 너나 잘해.”

 지아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걱정해 줘도 짜증이냐? 분란만 일으키는 주제에… 요즘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실까?”

 민선혁은 이제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나를 믿지 누굴 믿어?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직접 해결해 주던가. 그럴 거 아니면 신경 꺼.”     

 지아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홰홰 저으며 민선혁을 앞질러 걸어가 버렸다.    

  

 “야. 미친. 너. 거기 안 서?”

 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등 뒤에서 씩씩거리며 땅바닥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은영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이런 식으로 그를 대하진 않았던 것 같다.      


***     


 사무실에 돌아와 의자에 앉으니 피로가 몰려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목 받침대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대표였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 아이고. 김변호사님. 지금 통화될까요?     

 

 이게 무슨? 대표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호칭까지 높여서 불렀다.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여차하면 그만둔다고 엄포를 놓거나 맞짱뜰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되려 비위를 맞춰오고 있었다.      


 “네. 대표님. 말씀하세요.”

 - Z기업 이사님 때문에 고생이 많지요?     


 “아. 네…”

 - 그분이 하도 유별나서 말이죠. 김변호사와 상담한 후 나한테 한 소리 하더니 여기저기 다른 로펌을 기웃거렸나 봐요. 그래봤자 별수 있나. 결국 좀 전에 다시 날 찾아와서 피해자와 합의하겠다며 꼬리를 내리더군요. …… 그래도 김변호사. …… 좀 살살하시지. 소년원은 또 웬 말입니까. 우리 김변호사답지 않게 왜 그랬어요. 의뢰인을 협박까지 하시다니.      


 그게 아니고요. 훈구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어머니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승산이 없기에 좀 강하게 밀어붙였을 뿐입니다. 지아는 여차저차 해명하려고 달싹거리는 입을 걸어 잠갔다. 이상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오해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대표의 반응을 보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싶었다. 모로 가도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만이었다.      


 - 김변호사가 우리 로펌의 에이스라고… 내가 이사님 자~알 달래 놨으니까 … 훈구 사건은… 걱정 안 해도 되겠죠? 허허허.     

 대표가 동의를 구하듯 묻더니 멋쩍게 웃었다.


 “네. 대표님. 그렇게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지아는 짐짓 태연한 척 답했다.      


***     


 지아는 대표와 통화 후 철수 부모님과 연락해 합의를 끌어냈고 훈구 어머니는 손해배상금을 전달했다. 철수는 민사소송을 취하했고 훈구에게 유리한 탄원서를 작성해 주었다.      


 지아는 재빨리 전학 처분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과 집행정지 신청을 제기했다. 곧이어 집행정지 심문기일이 잡혔고 순조롭게 의견진술을 마쳤다.      


 며칠 후 박 차장이 길제범 씨 사건 때문에 사무실에 들렀다.      


 “김변호사님. 원고 보험회사의 준비서면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지아는 박 차장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 들다 말고 문득 훈구 사건이 궁금해서 물었다.      

 “참. 박 차장님. 전학 처분 집행정지 결과가 나왔을까요?”

 “네. 좀 전에 확인해 보니 신청이 인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학 취소 소장에 대한 행정심판위원회의 답변서도 도착했습니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지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집행정지신청이 인용됐다는 것은 일단 청신호였다. 법원에서 전학 처분의 위법성 여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니까.      


 박 차장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고 지아는 이 주간 쌓였던 피로가 한 방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때마침 수민이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었다. 고개를 들이밀며 조심스레 묻는다.  

   

 “은영. 바빠?”

 “아니. 오늘은 이대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아.”


 지아의 가뿐한 대답을 듣고도 수민이 몸을 배배 꼬면서 머뭇거렸다.     


 “왜?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헤헷. 어뜨케 알았쪄?”     


 수민의 혀짤배기소리에 송충이가 붙은 듯 지아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만. 그만하고 어서 원하는 거나 말해.”

 “정말? 정말? 나 오늘 민우랑 주혜, 그리고 소한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는데~ 신입 중에서 내가 나이가 젤 많아서 말야. 혼자서 연장자라 좀 불편해서… 은영~ 너도 같이 가주면 안 돼?”  

   

 “내가 왜 거길 끼어?”

 “이이 이잉. 같이 가자. 같이 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너 예전부터 가보고 싶다고 노래 불렀던 신대방역 포차 거리에 갈 끄야.”     


  솔직히 오늘은 지아도 시원하게 술 한잔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민우와 주혜가 같이 있는 자리라니… 포차는 솔깃했으나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닭꼬치에 소주 먹을 건데. 끝나고 버스킹도 볼 예정이야.”

 “버스킹?”


 버스킹이라는 말에 지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 거기 근처에 밤늦게 종종 버스킹도 한다던데. 몰랐어?”     


***     


 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신대방역에 내렸다. 이른 시각이라 포차 거리는 한산했다. 수민이 찜해뒀다는 가게의 문을 열자 요리 때문에 생긴 열기와 습기가 훅, 하고 마중 나왔다.     

 

 지아의 안경이 순식간에 뿌예졌다. 김 서림 너머로 흐릿하게 가게 내부가 보였다.    

  

 벌써 취한 듯 목소리가 높은 남녀 한 쌍은 구석에, 막 도착했는지 물 잔만 앞에 두고 앉은 남정네 무리는 중앙에 있었다.      


 “사장님. 여기 막걸리 한 병 더 주세요.”

 “네네~~”


 “사장님. 여기 소주부터 주세요.”

 “네네~~”     


 손님이 많은 편도 아니었는데 안은 시끌벅적했고 인심 좋아 보이는 사장은 바빴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쭈글쭈글한 양은그릇을 부딪쳤다. 쭈욱 막걸리를 들이켠 후 안주를 집어 먹으며 연신 맛있다고 감탄했다.      


 흘끗 살펴보니 테이블 위에 파전과 우동, 두부김치, 고갈비, 빈 막걸리병 세 개가 놓여있었다.     

 

 둘이서 저걸 다? 지아가 놀라고 있는 동안 수민은 입구 쪽 플라스틱 원형 테이블을 가리키며 주인장에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우리 일행이 다섯인데 여기 의자 하나 더 놓아도 될까요?”     

 사장은 흔쾌히 간이의자 하나를 내어주고선 다시 요리에 전념했다.      


 “여기가 맛집으로 소문나서 조금만 늦어도 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데.”     


 아직은 썩 내켜 보이지 않는 지아에게 수민이 설명하며 자기 바로 옆에 지아를 앉혔다. 그리고 소소한과 민우가 차례대로 앉으니 지아의 맞은편 자리가 민우 차지였다.      


 그때 차주혜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소소한과 민우 사이에 끼여 앉았다.


 “저 여기 앉아도 되지요? 우아앙~~~ 이변호사님 덕분에 오늘 잘 먹겠습니다.”     


 그 때문에 지아는 차주혜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상황이 다. 술이 고팠다.


 “사장님. 여기. 우선 소주 두 병 주시고요. 닭꼬치랑 골뱅이무침, 제육볶음은 되는 대로 빨리 주세요.”   

  

 수민은 단골처럼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이전 22화 잘못된 모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