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님. 훈구 사건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훈구 어머니가 오후에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지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급하게 훈구 사건을 처리해야 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 며칠 후 철수가 몹시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한데 십만 원만 더 빌려줄 순 없냐면서요. 급하게 돈을 쓸 일이 생겼다면서요. 얼굴을 보니 누구한테 맞았는지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아서 더는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도 성적 때문에 아버지한테 맞아서 멍든 적이 종종 있었거든요. 친구들이 왜 다쳤냐고 물으면 ‘그냥, 넘어졌어’라고 말하곤 했기에 철수에게도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놈의 멍 때문에 제가 마음이 약해졌던 겁니다. 준수한테 십만 원을 빌려서 철수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철수는 하루만, 하루만, 하면서 계속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우리끼리 돈을 빌리면 보통 하루에 만 원씩 이자를 붙여서 갚곤 했는데 두 주가 지나는 바람에 저는 준수에게 이십사만 원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어릴 때부터 모아 온 돼지저금통의 배를 갈랐습니다.
그걸 재수 없게 아버지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금통을 쓰레기와 함께 버렸는데 어쩌다 아버지가 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대뜸 제 목덜미를 잡고 돈을 어디에 썼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집은 잘살지만 아버지는 꽤 검소하고 엄격한 편입니다.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어서 문제집을 샀다고 했더니 그게 또 화근이었습니다. 저금통 깨서 문제집을 산다는 게 말이 되느냐. 이제까지 준 용돈은 다 어디에 썼느냐. 아버지는 더 많이 화가 나셨습니다. 결국 저는 거짓말한 후레자식이 되어서 죽도록 맞았습니다.
그다음 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학교에 갔는데요. 철수는 여전히 하루만, 할 뿐이었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저는 철수를 화장실 변기 칸에 몰아넣고 몇 대 패주었습니다. 그리고 내일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는데요. 철수가 어젯밤에만 해도 이백만 원을 땄는데 그깟 돈을 못 갚겠냐면서 되려 화를 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지금껏 밤마다 현준이 무리와 피시방에서 인터넷 도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딴 돈을 어쨌냐고 했더니 그날 다시 다 꼬라박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눈이 뒤집혀서 이번 주 안으로 삼십만 원을 갚고 현준이 무리와 관계를 끊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철수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이자까지 다 쳐서 백만 원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각서를 쓰라고 했고 철수는 그날 각서를 써줬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여전히 철수는 돈을 갚지 않았고 저는 그때부터 각서를 가지고 철수를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안 갚으면 친구들 단톡방에 올리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말이 안 통해서 저는 각서 사진을 찍어서 단톡방에 올렸습니다.
그 때문에 철수가 밤에 스터디카페로 찾아왔고 우리 둘은 근처 편의점 옆 골목에서 말다툼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편의점에 라면을 사 먹으러 온 민호와 준수가 우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호가 이 ×× 완전 상습범이네, 하면서 철수를 때렸습니다.
철수가 민호에게도 돈을 빌렸던 모양입니다. 저도 덩달아 같이 철수를 팼습니다.
그때 준수가 친구들 단톡방에 ‘여기 싸움 났다’고 톡을 올렸고 건너 건너 이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하나둘 싸움 구경하러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다 현준이 무리까지 오게 되었는데요. 현준이는 제가 학교에다 뒀던 골프채를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건 아버지에게 맞은 다음 날 화가 나서 몰래 집에서 가지고 나왔던 건데요.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골프채였습니다. 학교에서 애들이랑 가지고 놀다가 청소도구함에 버려뒀던 걸 어떻게 현준이가 알고 들고 왔습니다.
현준이가 그걸로 철수를 사정없이 때렸고 나머지 애들도 가세해서 엄청나게 일이 커졌습니다. 철수가 코피를 흘리고 아파서 땅바닥을 뒹구는데도 계속 때렸습니다. 그런데요. 변호사님. 제가 그 애들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고소하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제가 미친놈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철수는 119에 실려 갈 지경이 되었고 저와 나머지 애들은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철수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친구들과 현준이 무리까지 모두 철수와 화해를 했는데요.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지만요. 변호사님. 저는 용서를 구하고 철수와 다시 잘 지내고 싶습니다. 전학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준이가 또 다른 사고를 쳐서 소년원에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경찰 아저씨가 철수와 합의 못 보면 큰일 난다고 했는데 저도 현준이처럼 소년원에 가게 될까 봐 무섭습니다.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천훈구 올림
이제껏 지아가 만나본 당사자들은 법률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사정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알지 못했다. 억울한 감정만 토로하기에 바쁘거나 횡설수설해서 제대로 된 상담이 어려웠다. 더욱 곤혹스러운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훈구는 의외였다. 핵심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지아는 훈구의 편지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럴 수가. 아이가 부모보다 훨씬 낫잖아.
***
지아와 훈구 어머니가 사무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피해자와 합의를 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만한 일로 학폭 신고에 형사고소에 민사소송까지 제기하는데 내가 어떻게 합의를 하겠습니까?”
“어머니. 상대방 입장도 생각을 해보세요. 아이가 그렇게 다쳤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나마 검사가 훈구를 소년보호사건으로 송치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화해를 하셔야 보호처분도 경하게 받고 전학 처분도 취소할 가능성이 있지요.”
“아니~~ 변호사님은 도대체 누구 편입니까. 왜 자꾸 상대방 편만 듭니까. 내가 왜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까.”
“어머니.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것은 상대방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훈구를 위하자는 일인데 왜 오해를 하고 그러세요? 어차피 민사소송으로라도 손해배상을 해줘야 하는 형편이니 합의로 빨리 분쟁을 끝내셔야지요. 그래야 훈구도 다시 학업에 집중하고 학교생활도 잘하지 않겠어요?”
“아니~~ 그럴 거면 내가 왜 돈을 주고 변호사를 선임했겠어요? 변호사님이 다 알아서 해결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머니께서 합의할 생각이 없으신데 제가 어떻게 상대방에게 합의를 제안합니까?”
“누가 합의를 하자고 했어요? 소송을 이겨 달라고요. 소송을.”
훈구 어머니의 억지가 지아를 아연케 했다.
“훈구가 잘못한 일인데 그냥 어떻게 소송을 이겨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요.”
지아가 맞받아쳤다.
그 순간 훈구 어머니의 인상이 험하게 구겨지면서 눈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더니 돌변한 목소리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지아에게 퍼부었다.
“당신. 뭐야? 어? 우리 변호사 아냐? 어? 그런데 왜 자꾸 상대방 편을 들고 난리야? 내 아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래?”
아무리 자식 일로 판단력이 흐려진 어미라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어디서 반말이세요?”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훈구 어머니에게 말했다.
“수임료 돌려드릴 테니 그 돈으로 합의부터 하세요. 저를 해임하셔도 좋습니다. 이 사건은 변호사가 있는 것보다 손해배상이 더 효과적입니다. 훈구는 지금 소년원에 갈까 봐 벌벌 떨고 있는데 어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진정 아들을 위하신다면 상대방에게 가서 무릎을 꿇든지 울면서 매달리든지 어떻게든 용서부터 받으세요. 저는 지금부터 이 사건에서 손 뗄 테니 다른 변호사 알아보시고 당장 여기서 나가주세요.”
지아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울그락불그락한 낯빛이 되었다.
“당신!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가만두지 않겠어!”
반박할 말을 못 찾았는지 훈구 어머니는 엉뚱한 소리로 분풀이를 하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창을 향해 시선을 돌린 지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어머니는 모른다. 내 자식만 감싸고도는 것이 오히려 훈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반성하고 화해하고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엄마 스스로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너도나도 내 아들 내 아들 하면 모두가 남의 아들에게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난 훈구를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추락하는 새처럼 만들고 싶진 않아.
지아의 입에서 또다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