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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26. 2024

전에 없던 의지

 지아는 여섯 살 때 처음 발레를 접했다. 타고난 약골이어서 발레를 시작한 것인지, 엄마의 오랜 로망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학원에 들어섰을 때의 장면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감청색 레오타드를 입고 우아하게 지아를 맞이했던 선생님. 균형 잡힌 움직임과 완벽하리만치 절제된 이미지에서 지아는 발레의 본질을 알아챘던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도배한 또래들은 천방지축이었지만 바 뒤에 서서 1번 포지션의 발을 만들 때만큼은 집중을 넘어서 진지하기까지 했다.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팔 동작을 따라 하고 1번부터 5번까지의 발 모양을 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체형과 리듬감이 좋았던 지아는 금방 발레가 늘었다. 몇 번의 연례 발표회 후 콩쿠르에서 입상하기에 이르렀다. 엄마의 치맛바람이 거세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엄마는 선생님께 진로에 대해 논의했고 엄격하게 지아를 관리했다.      


 그러나 지아는 발레보다 연기와 노래를 더 즐겼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발레 수업을 건너뛰었고, 그 때문에 엄마와 심하게 다투었다. 이후 지아는 더욱 심드렁해졌다. 점차 연기의 보조 수단으로 필요한 만큼만 발레를 했다. 엄마의 극성스러운 관심이 오히려 지아와 발레를 갈라놓았다.     

 

***     


 학원 내부는 공간이 넓고 천장은 높았으며 분위기는 화사했다. 연습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이가 긴 변의 벽 한 면이 전부 거울이었다. 맞은편 창으로 근린공원의 나무들이 보였고 창 가장자리 쪽 모서리에 오래된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피아노 곁엔 백조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발레 의상이, 그 바로 옆엔 새하얀 바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지아가 피아노 위에 놓인 티아라와 천장의 샹들리에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뒤에서 수민이 불렀다.      

 “은영. 이리 와. 얼른 등록하자.”

 “어, 응.”


 성큼성큼 다가온 수민의 손에 이끌려 지아도 상담실로 들어갔다.     


 상담실은 물건을 고른 사람의 안목을 짐작게 하는 고급스러운 엔틱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지아의 시선이 리시안셔스가 담긴 화병에 머물렀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수민 씨는 발레가 처음이라고 하던데 은영 씨는 어때요? 배워본 적이 있나요?”


외모는 갓 대학교를 졸업한 사회초년생 마냥 어려 보였지만 능숙한 말투에서 선생님의 연륜이 느껴졌다. 말투와 걸맞지 않은 천진한 눈빛 때문에 선생님의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아, 처음입니다. 관심은 가져왔지만…”

 수민이 발레에 문외한이었고 은영도 발레를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은 익숙한 대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레를 하려는 목적과 특별히 안 좋은 신체 부위가 있는지 물었다.      


 지아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잠자코 있자 수민이 대답했다.

 “우리 둘 다 몸은 건강합니다. 그런데 살이 많이 쪄서요. 선생님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왔습니다.”     


 자신처럼 되고 싶다는 말에 선생님은 부끄러운 듯 가볍게 웃더니 살 빼는 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딴 건 몰라도 그건 확실하게 해 주겠다고…….     


 수민은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다가올지 꿈도 꾸지 못한 채. 학원 안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오로지 수민뿐이었다.      


***     


 지아와 수민은 기어가다시피 움직여 겨우 학원을 빠져나왔다. 둘 다 온통 땀으로 젖어있었다.

 “은영. 나 이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우리 아아 한 모금만 하고 가자.”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키고 1층 카페의 문을 열었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주인장이 둘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수민은 접수대 쪽으로 눈 돌릴 힘도 없는 사람처럼 비어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은영. 주문 좀 해줘. 나 일어날 수가 없어.”     


 지아가 주문한 음료를 받아 들고 돌아와 보니 수민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어서 마셔.”

 빨대를 꽂아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수민의 코앞에 들이밀고 지아도 한 모금 마셨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얼음물이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내려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왔다.      


 카페인이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그제서야 수민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평상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민은 성인이 되어서 발레를 시작한 사람의 충격과 당혹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야. 발레가 이런 거였어? 스트레칭만으로 만신창이가 되었잖아. 내 몸이 이렇게나 뻣뻣한 줄 누가 알았겠냐. 나무토막이 따로 없어. 다른 사람들은 일자 다리 찢기를 잘도 하드만. 고무줄처럼 몸이 쫙쫙 늘어나던데…….”

 ‘너만 놀란 게 아냐. 난 지금 정말 멘붕이라고.’     


 “매트에서 일어날 수가 없지 뭐야. 정말 죽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바는 또 어떻고. 선생님이 발을 옆으로 하고 뒤꿈치를 붙이라는데 그 자세론 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어. 게다가 그대로 무릎을 붙이라고 시키다니. 그게 가능키나 해? 인간의 신체는 애초에 그렇게 움직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 왜 근육을 비트냐고? 아. 용어도 너무 헷갈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그래. 턴 아웃. 내가 턴 아웃이 안 되더라고.’     


 “그리고 너 봤어? 선생님의 표정. 우리가 힘들어할수록 천사처럼 웃고 있었어. 우리의 고통을 즐기는 것 같았어. 나 그때 알아봤잖아. 사실 선생님에겐 악마의 꼬리가 있다는 걸. 이 무슨 조화냐?”

 “…….”


 맞장구쳐야 하는데 너무나 쇼크 받은 터라 지아는 말이 안 나왔다.      


 “은영? 괜찮아? 너 지금 얼굴이 새파래. 너무 무리했나? 괜히 발레 하자고 한 건가?”

 수민은 의욕에서 충격, 그리고 급격하게 회의 모드로 전향할 기세였다.


 “아냐. 오늘이 처음이라서 그래. 다음부턴 좋아질 거야.”

 지아가 수민을 안심시켰다.      


 “그지? 그렇겠지?”

 지아의 말에 수민은 바로 수긍했다. 이렇게 단순하다. 우리의 수민은.     


 “물론이지.”

 지아가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나 지아는 속이 속이 아니었다.      


 아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수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발레를 그리워했었구나, 하면서 다소 감상에 젖기까지 했다.      


 그런데 매트에서 몸을 풀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발등이 안 펴졌고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를 옆으로 벌리는데 90도가 한계였고 양다리를 붙이고 상체를 숙이는데 손으로 발을 잡기는커녕 똑바로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어찌나 용을 썼던지 호흡곤란이 왔다. 바 앞에 서기도 전에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발레는 다른 춤과 차원이 달랐다. 마음이 아니라 근육과 뼈가 기억하는 것이었다. 설지아의 육체가 사라지면서 지아는 발레에 있어서 만큼은 초기화가 되어버렸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은영은 건강했고 스포츠엔 적절한 몸이었다. 그러나 유연성이 부족했고 속 근육이 부실했다. 그 때문에 발레에서 요구되는 풀업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대론 중력을 거슬러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비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몸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발레를 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몇 년 했다고 말했으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기초반에서 이 지경인 걸 보면 앞날이 어떨지 뻔했다.      


 골치 아픈 사건만큼 발레가 어려워졌다. 힘드니까 오히려 투지가 생겼다. 테이블 아래 근육의 뻐근함이 발을 타고 올라와 상체까지 욱신거렸다. 그 순간 지아는 전에 없던 의지를 다졌다. 제대로 발레를 해보겠다고.     


***     


 요일 아침 지아는 출근 후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발신자가 눈에 익지 않은 이름이었고 제목도 없어서 스팸인 줄 알았다. 메일을 삭제하려다 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우스를 클릭했다.      


 -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저는 지난주에 엄마와 상담받으러 갔던 훈구입니다.     

 

 아. 훈구였구나.      


 계속 읽으려다 잠시 멈췄다. 상담 내내 자기 일이 아닌 듯 방관만 하던 훈구의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굳이 왜 편지를 썼을까. 지아는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첫 줄부터 읽어 내려갔다.    



  

 -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저는 지난주에 엄마와 상담받으러 갔던 훈구입니다. 편지를 쓸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몇 번 고쳐쓰기도 했어요.      


 결국 메일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엄마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엄마는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엄마에게 저의 잘못이야기했습니다. 그런다 듣고 난 엄마는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잘못이 아니라는 거지.      


 엄마는 마치 무한도돌이표 악보를 보고 계신 것 같아요. 제 말을 안 듣는 건지, 이해를 못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상담 때 변호사님도 보셨지요? 그래서 엄마 앞에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사정을 이렇게 메일로 씁니다.  

    

 사실 철수와 저는 중학생 때부터 절친이었습니다. 같은 학원에 다녔고 주말엔 같이 스터디 카페에 갔습니다. 철수가 야구를 좋아해서 함께 야구장을 간 적도 많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같은 반이 되었을 때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1학기 중간고사 이후로 철수가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학원에 오지 않았고 함께 운동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현준이 무리랑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걔들 정말 질이 나쁘거든요. 물론 저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하루는 철수를 따로 불렀습니다.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어봤지요. 철수는 대답은 안 하고 대뜸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이십만 원이나.     


 주머니를 뒤져보니 오만 원밖에 없어서 그냥 오만 원을 줬습니다. 다음날 갚으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철수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다시 불러내서 물었더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곧 한 건 할 것 같다면서요.      



 

 이까지 읽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박 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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