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허설을 마쳤다. 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늘 그래왔듯 이번 공연도 멋지게 해낼 거라 믿었다.
두통약 두 알을 삼키고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실력을 인정받는 바람에 주어진 개인 대기실. 공연 직전 홀로 차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감회가 새롭다.
순회공연의 마지막 날인 오늘만 지나면 적어도 석 달은 쉴 수 있다. 당분간 아무런 일정도 잡지 말라며 매니저에게 요청한 참이었다. 느긋한 일상이 주어질 것을 생각하니 두통이 얕아졌다.
약 기운이 돌면서 긴장도 풀렸다. 원목 팔걸이에 고개를 기대곤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감색 원단의 소파에서 천연가죽 향이 은은하게 번졌다.
찬란한 환호와 기립 박수를 상상하며 마음을 달랬다. 지아는 곧 환하게 웃으며 청중을 맞이하러 갈 것이다.
***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드문드문 통유리를 통해 스며들었다.
잠들었었나?
정신이 든 지아는 선득한 기운을 느끼며 갑자기 초조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왜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았을까.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데 핸드폰은 온데간데없고 눈앞이 낯설다.
어? 여긴 어디?
좀 전까지 기대었던 포근한 소파는 없고 지아는 차가운 사무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지나치게 하얀 천장, 철제 프레임에 유리를 얹은 테이블, 벽돌처럼 두꺼운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 그리고 사무용 책상 위에 질서 없이 흩어진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생소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혹시 납치? 감금?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눈앞이 팽팽 돌고 호흡이 가빠졌다. 숨이 막혀왔다. 십 년 전 부모님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공연은? 크리스틴이 없는 오페라의 유령? 아니면 대역을 썼을까?
그럴 리 없다. 오페라의 유령에 삽입된 곡들은 성악을 전공한 지아도 컨디션 조절을 잘해야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었다. 공연 직전에 펑크 낸 배우를 대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지아는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공연장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헐떡이며 도착한 공연장엔 드문드문 외등만 켜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핸드폰이 없어 매니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다. 로비 앞 회중시계의 시침은 공연이 한창일 여덟 시를 가리키는데 썰렁하게 비워진 공연장이라니.
순간 어지럼증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 지아를 발견하고 멀리서 바닥 청소를 하던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데라도?”
“아. 아닙니다. 아주머니. 그런데 오늘 일곱 시에 하기로 한 공연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모르셨어요? 여자 주인공이 실신해서 공연이 취소되었어요. 대기실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는데, 구급차가 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배우 지금쯤 어떻게 되었나 몰라.”
이게 무슨?
그때 입구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지아는 소리를 지를뻔했다.
그곳엔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저기요. 괜찮아요? 아까부터 계속 안 좋아 보이던데, 119라도 부를까요?”
“아주머니. 어떻게 해요? 저기 다른 사람이 서 있어요.”
지아가 가리키는 곳엔 그녀와 아주머니 말곤 아무도 없었다. 의아해진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누가 있다는 말이에요?”
“저기에 제가 아니라 이상한 여자가 있어요.”
아주머니는 별 미친, 하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끌끌 찼다.
“오늘 일진이 안 좋나. 왜 이렇게 이상한 일이 꼬이지?”
중얼거리곤 멀찌감치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바삐 걸어가 버렸다.
뭐야. 저 여자 뭐야. 지아는 창으로 다가가며 속으로 외쳤다.
이런!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봐도 낯선 사람이었다.
지아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서자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옆에 벽이 없었다면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거울 속 여인은 피로에 찌든 안색에 굵고 짙은 단발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쁜 구석이라곤 아무리 봐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분명 태어나서 로션이란 걸 한 번도 바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의 피부가 이 지경일 수가 있어?
행색은 또 어떤가.
여자는 라인이 비뚤어질 정도로 목이 늘어진 셔츠에 무릎이 툭 튀어나온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패션 리더였던 지아로선 경악할만한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푸짐한 살집을 감출 생각이 없는 구부정한 자세로 시체나 다름없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만 사각 뿔테 안경 너머 눈동자만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아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흔적을 찾으려 거울을 보고 또 봤다.
길고 호리호리한 팔다리는 어디에 갔을까.
갸름한 얼굴은?
남자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깊고 그윽한 눈, 희고 반짝이는 피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지킬 앤 하이드에선 순수한 엠마역을 소화했고, 노트르담 드 파리에선 요염하고 발랄한 에스메랄다였던 배우, 오페라의 유령에선 요정 같은 크리스틴을 꼭 닮은 지아는 왜 여기에 없는가.
고혹적이라 칭찬받던 제 몸이 왜 이런 몸뚱어리와 바뀌었을까. 그녀는 벽에 기대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고 있는다고 상황이 바뀔 리 없었다. 지아는 자신이 깨어났던 사무실에서 단서를 찾기로 결심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사무실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
지아는 소원을 주문처럼 외며 사무실로 향했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빌딩들이 즐비한 곳. 사람도 많고 차도 많은 거리를 정신없이 걸었다. 사무실 근처 왕복 십이 차선 사거리에 다다랐을 때 지아는 건물 꼭대기 전광판에서 비극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속보! 뮤지컬 배우 설지아 사망.>
자막과 함께 자신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장면과 병원 관계자 진술이 담긴 영상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오늘 오페라의 유령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홀로 별이 되었습니다. 아역배우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던 그녀는 훌륭한 가창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국민 여동생이었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여신으로 성장한 설지아 씨는 많은 남성을 잠 못 이루게 했었는데요… 최근엔 다양한 작품으로 깊은 연기력까지 인정받으면서 기대가 컸던 배우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뉴스를 전했다.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더듬거렸다. 눈물을 살짝 비치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지아의 골수팬이었던 것 같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지아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죽다니. 내가 죽다니. 말도 안 돼.
도대체 왜?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문란하게 살아서?
뭇 남성들에게 상처를 줘서?
그래서 벌을 받은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른다섯 꽃다운 나이에, 이제 막 피어난 인생의 향기를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매력을 뽐내지도 못했는데. 이게 말이 돼?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럴 거면 왜 이렇게 예쁜 몸을 준 거야?
그대로 주저앉은 채 지아는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심장이 꿈틀, 하며 뭔가를 속삭였다.
- 나를 살아줘.
환청인가. 지아는 의심했다. 그러나 다시 심장이 속삭였다.
- 나 대신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