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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Feb 21. 2024

그래, 이렇게 끝낼 순 없지

 지아는 심장의 속삭임에 홀려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또래로 뵈는 여자가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영, 어딜 다녀온 거야? 한참 기다렸잖아.”     


 막역하게 대하는 태도가 이 몸과의 친분을 암시했다. 지아의 직감이 말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그녀와 잘 지내야 해.      


 “으응, 잠시 바람 쐬러…”

 “웬일? 우리 김변호사께서 자진해서 쉬러 나가기도 했다구?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난 네가 안 보여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      


 얘, 족집게인가? 엄청난 일이 있긴 했지.      


 하루아침에 김은영이라는 몸에 설지아가 빙의되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은영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얼른 앉아. 배 안 고파?”     


 고민할 겨를도 없이 여자가 재촉했다. 여자는 지아 앞에 김밥을 들이밀었다.   

   

 “먹어. 굶고 있는 널 위해 이 언니가 준비했어. 요 아래 김밥집 새로 생겼다고 전단지 돌리더라. 알바생이 엄청 열심히길래 사봤지. 맛이 어때?”

    

 지아는 여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재빨리 사무실 내부를 스캔했다.      


 아, 여기가 로펌이라는 곳이구나.     


 족히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위촉장, 각종 상패와 메달이 즐비하게 전시된 책장이 은영의 경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특히 책상 위에 놓인 크리스털로 제작한 명패가 지아의 눈을 자극했다. 금색으로 각인된 ‘변호사 김은영’ 여섯 글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하필 왜? 어쩌자고 변호사의 몸에 빙의한 거야? 나 같은 머리로 이 상황을 어쩌라고?      


 지아는 혼이 빠진 채 김밥을 욱여넣다 사레에 들렸다.      


 “켁켁”

 “목 막혀? 아이고, 천천히 먹지.”     


 여자가 놀라며 물을 따라준다.      


 물을 마시며 지아는 생각했다. 목이 막힌 게 아니라 기가 막혀 그런 거라고.      


***     


 여자의 이름은 이수민. 은영의 절친이자 동거녀였다.      


 둘은 S대 법학과 동기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다.      


 종일 선배들을 따라 몰려다닌 후 밤늦게 마신 막걸리 때문에 은영은 꽐라가 되었다. 같은 조였던 수민이 은영을 부축해 기숙사에 데려다준 인연으로 둘은 친구가 되었다.      


 은영은 삼 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바로 법무법인 KNG에 입사했고 지금은 같은 법인에서 시니어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이에 반해 수민은 반복해서 시험에 낙방했다.      


 수민은 오지랖이 넓은 탓에 동네 홍반장처럼 주변의 대소사를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병적 수준의 다정함으로 갖은 사건에 휘말리다 사법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시험에 붙지 못했다.    

  

 결국 로스쿨에 입학했으나 다섯 번의 시험 기회 중 네 번까지 말아먹는 바람에 지도 교수님의 애간장을 다 태운 제자가 되었다. S대 출신으로선 이례적인 케이스라 엄청난 불명예이기도 했다.      


 수민은 교통사고 난 사람을 도와주다 제시간에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했고, 어려운 형편의 동기를 돕겠다고 생활비를 몽땅 동기 등록금으로 대납하고선 몇 탕씩 알바를 뛰곤 했다.   

  

 심지어 친오빠가 이혼하고 술독에 빠져있는 동안 어린 조카들 돌보느라 몇 년을 보냈다.   

  

 제대로 공부에 매진한 적이 없어 마지막 일 년이 남았을 때, 보다 못한 은영이 납치하다시피 자기 집에 데려왔다. 함께 살면서 개인 과외를 해주며 샛길로 새지 않도록 감시했다.      


 은영은 오 일간의 변호사시험 기간 내내 휴가를 내고 수민 곁에 바싹 붙어 있었다. 한눈팔지 않고 시험에만 올인하도록 독려했다.     


 그 덕에 수민은 변호사가 되었고 지금은 KNG의 어쏘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지난 이틀간 지아가 은영의 방을 뒤져 찾아낸 은영과 수민에 대한 정보였다.    

  

 은영은 메모 중독자로 보일 만큼 꼼꼼하게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고 지아는 그것들을 탐독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빙의 시점이 칠월 말부터 시작된 법정 휴정 기간 중이었다. 이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 놔, 어떻게 변호사 업무에 적응하지?      


 거실 소파에 앉아 똥 씹은 얼굴로 앉아 있는데 수민이 물었다.     

 

 “김변~~ 너 또 사건 고민하고 있지? 제발 좀 그만해. 일 걱정은 회사에서만 하기로 약속했잖아. 네가 뱉어내는 한숨 때문에 이 멋진 집안의 공기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다. 저 길 건너편을 바라봐. 휘몰아치며 흘러가는 한강의 물줄기가 말을 거는 것 같지 않니?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게 느껴지지 않아? 우리 이렇게 집구석에만 있지 말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심정도 모르고 한가한 소리나 일삼고 있는 수민이 얄미웠다. 지아는 절로 뚱하게 응수했다.   

   

 ”왜? 뭐?“     


 ”황금 같은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잖아.”      


 수민은 지아의 말투엔 아랑곳하지 않고 촉촉한 눈길로 말했다. 반곱슬에 둥글고 까만 눈동자가 몰티즈를 연상케 했다.      


 헐, 너무 부담스럽다. 도대체 뭘 바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이맘때쯤 은영은 수민과 무엇을 했을까?      


 은영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대답했을까?


 잠시 고민하던 지아는 둘의 관계를 생각해 뭐든 수민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그래 알았어.”

 “꺄오. 네가 웬일이야. 바로 준비할게.”     


 수민은 괴성을 내지르곤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게 무슨 상황? 지아는 그대로 거실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야. 너 뭐 해? 나갈 준비 안 해?”     


 쏜살같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수민이 재촉했다.     


 “응? 응.”


 지아가 얼떨결에 대답하곤 은영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수민이 버럭 화를 냈다.


 “옷 갈아입으라고 하는데 왜 다시 방으로 기어들어 가?”    

 

 여기가 아닌가?      


 눈치를 보아하니 북향에 있는 방이 은영의 드레스룸인 것 같다. 뒤통수로 내리 꽂히는 수민의 잔소리를 피해 재빨리 옷방의 문을 열었다.      


 아, 그런데 지아의 눈에 들어온 방은 썰렁함, 그 자체였다.     

 

 빈 옷걸이만 즐비하게 걸려 있고 몇 안 되는 옷은 죄다 무채색 계열이었다.      


 얘 뭐야? 까마귀야? 비둘기야?      


 개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지 정장 세트뿐이었다.      


 시니어 변호사 정도면 수입이 많지 않나?      


 어째 모조리 저가 브랜드만 입나?    

  

 지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게다가 은영에겐 멀쩡한 일상복은 물론 변변한 가방 하나 없었다.  

    

 달랑 에코백 하나와 낡아빠진 업무용 서류 가방이 전부였다.   

   

 유일하게 넘치는 아이템은 야구모자였다. 색깔별로 일곱 개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었다. 지아는 이 센스 없는 은영에게 예쁜 옷이랑 가방을 사줘야겠다는 소명의식이 생겼다.     


 쇼핑할 생각을 하니 좀 전까지 자신을 짓눌렀던 근심 걱정이 싹 사라져 버렸다.    

  

 삶의 의욕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     


 수민이 말했던 그 유의미한 일이란.      


 두둥! 바로 쇼핑이었다.     


 어쩜 이렇게 마음이 짝짝 맞을까. 앞으로 수민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에 급격히 기분이 좋아졌다.


 쇼핑은 지아의 전문 분야였던 것이다.      


 백화점에 들어서면 향기부터 달랐다. 바깥 세계와는 단절된 그들만의 세계였다.      


 조명 아래 자신의 미모를 뽐내는 옷들. 진열장 안 곱게 앉은 가방들.      


 한번 신어 보세요, 유혹하는 깔끔하게 정돈된 구두들.    

  

 세로토닌이 합성되어 피로감을 느낄 수 없는, 지아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였다.      


 친절한 점원들에게 더없이 친절한 미소로 화답하며 지아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생기를 뿜어댔다.   

   

 수민도 기분이 좋은지 지아의 팔짱을 끼고선 통통거리며 애교를 피웠다.

      

 지아에게 수민은 여전히 좀 부담스러운 캐릭터다. 그러나 순수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수민이 낯설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지아는 이제껏 제대로 된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남자들에겐 찬양의 대상이었고 여자들에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다.      


 여자들은 뒤에서 지아가 남성 편력이 있네, 저거 다 성형한 얼굴이네, 하면서 흉보는데 열을 올렸다.      


 그 때문에 여자들과는 가까워질 기회가 없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이성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에 우정이란 걸 쌓을 여지가 없었다.      


 문득 지아는 수민을 바라보면서 잠깐 이 행운을 누려도 될까, 욕심이 들었다.      


 “우와. 이 가방 무지 이쁘다. 어때?”     


 수민이 짙은 청색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지아에게 물었다.      


 “너 이제 그 서류 가방 좀 버릴 때 안 됐냐? 십 년 전 변회 연말 행사 때 받은 거라면서. 협회 로고도 부끄럽고 너무 낡았어.”


 “그런가? 이 가방 들고 다니기엔 좀 크지 않나?”


 “얘가 뭔 소리야? 기록 넣어 다니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너야 거의 다 기억하니까 아이패드로 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서류 챙기고 하려면 이것도 작을 수 있겠다.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닌데 이참에 너 서류 가방 하나 사라.”     


 수민은 뭐가 그리도 신났는지 가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지아에게 들어보라, 메어보라 다양한 주문을 했다.      


 “이거 네 피부색이랑 딱이다.”


 하고선 자기가 사주는 것도 아니면서 제멋대로 가방을 골랐다.  

    

 그러다 갑자기 수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아의 옷자락을 잡고는 매장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왜 그래?”


 계 탄 날처럼 기뻐하던 수민의 태도가 돌변하자 지아가 물었다.     


 “그…….”


 수민은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하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지아는 수민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지아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쌍의 선남선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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