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게 다가온 남녀가 지아 앞에 섰다. 남자는 백팔십이 넘는 장신에 슈트가 제법 잘 어울리는 체구였다.
적당히 태운 구릿빛 피부와 매끈한 허리로 보아 최근에 골프 꽤나 치러 다닌 모양이었다.
얼굴은 평범해도 허우대는 멀쩡했다.
지아는 평소 습관대로 남자의 이미지를 한눈에 저장했다.
그런데 남자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듯 우쭐댔다.
“자긴 초면이지? 인사해. 내 대학 동기들이야. 여긴 김은영 변호사고 여긴 이수민 변호사. 나랑 같은 로펌에서 일하고 있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 사람 와이프예요.”
청담동 며느리 룩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여자가 도도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네, 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지아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동기 와이프라 하여 최대한 공손하게 대했다.
“서류 가방 사려고 나왔구나”
남자는 지아의 어깨에 걸쳐진 가방을 보고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방에 붙은 태그를 슬쩍 쳐다보더니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오늘이 첫 결혼기념일이라 와이프 선물 사주러 나왔거든. 휴정 기간 끝나고 봐.”
하더니 아내의 손을 잡은 채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는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여자의 손엔 적어도 10캐럿은 넘는 다이아가 핑크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저. 썩을 놈이!!”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민이 갑자기 부들부들 떨었다.
“야. 너 왜 그래?”
놀란 지아가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너 제정신이야? 만나서 반가워? 민선혁 그 자식! 따귀를 한 대 후려갈기지는 못할망정, 반가워?”
수민이 개 거품을 물었다.
백화점을 통째로 사버릴 기세로 쇼핑 나온 그녀였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신이 나 층 층이 구경하고 몇 시간을 돌고 돌 예정이었다. 그 의욕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수민은 주변을 다 불태워버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나 가자.”
지아에게서 가방을 뺏어 들고는 후다닥 계산을 마친 후 앞장서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
둘은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 들렀다.
“다 골라. 오늘은 내가 쏜다.”
수민이 지갑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곰표, 말표, 거위까지 포함한 다양한 캔 맥주와 소주 다섯 병, 오징어 땅콩 세 봉, 맥반석 오징어 두 마리를 쇼핑 바구니에 담았다.
“컵라면 두 개?”
해장라면이 생각나 지아가 말했다.
“두 개로 되겠냐?”
수민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짓더니 봉지라면을 다발로 집어 들었다. 20리터 종량제 봉투 두 장 가득 스낵과 초콜릿 등을 담아 들고선 편의점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수민이 맥주를 꺼냈다. 딸칵. 캔 따는 소리와 함께 포르르르 기포가 올라왔다. 수민은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혼자서 떠들어댔다.
“야. 이 답답아, 왜 말을 안 해?”
'뭔 말?'
“내가 그러니까 비밀연애 같은 거 하지 말랬잖아.”
'비밀연애?'
“공부 뒷바라지 같은 것도 하는 게 아니랬잖아.”
'뒷바라지?'
“그 노무 시키한테 아직도 미련이 남았어? 오늘 그 꼴을 보고도 가만 놔두고 말이야.”
'오늘 백화점에서 본 그 남자 말인가?'
“왜 말을 안 해? 왜 말을 못 해?”
'어쩌라고?'
“그놈 니 거였다고, 기껏 변호사 만들어놨더니 몰래 선봐서 결혼한 거라고!”
'헐. 은영이 닭 쫓던 개 신세라는 거야?'
“너 이렇게 맨날 아무 말도 안 하고 살면 심장마비 올 수도 있어.”
'응? 그럼 은영이 쓰러진 게 심장마비 때문이었던 거야?'
순간 심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욱신욱신.
절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왜 그래? 은영아? 어디 아파?”
울상이 된 수민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띵, 하고 2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얼른 들어가자.”
수민이 지아를 부축한 채 현관문을 열었다. 집안의 온기가 둘을 맞이했다. 요동치던 심장이 잠잠해져다.
“나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강골인 네가 이 지경인 걸 보면 속이 얼마나 썩었겠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혼자 흥분해 갔고 너한테 못 할 말 했어.”
하더니 수민이 훌쩍였다.
“아니, 뭐. 진짜로 괜찮아.”
지아가 싱긋 웃으며 수민을 달랬다.
사실 지아 입장에선 수민의 급발진 덕분에 은영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게 되었을 뿐 타격감은 제로였다.
다만 은영에게 남친이 있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은영은 누가 봐도 모쏠이라 할만한 외모였다. 게다가 은영의 신체에선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한 일말의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피부는 건조하다 못해 쩍쩍 갈라져 있었고 머리칼은 폭탄 맞은 양 부스스했다.
은영의 얼굴보다 가뭄의 논바닥이 더 촉촉하다 이를 수 있을 것이며, 은영의 머리칼보다 겨울철 마른 가지가 더 부드럽다 이를 수 있을 터였다.
제대로 화장품을 발라 본 적은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고, 마사지 숍 방문은커녕 마스크팩 한 장 붙여보지 않은 피부였다.
머리는 지아가 손수 자른다 해도 이보단 나은 모양일 것이고 빨랫비누로 감은 건 아닌지 손가락으로 쓸어도 잘 내려가지 않는 상태였다.
드레스룸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는 옷을 찾아 입었지만, 자신과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은영은 족히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얜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궁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지아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수민의 말에 따르면 민선혁이라는 인간과 은영이 칠 년이나 사귀었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오징어같이 생긴 녀석이 그토록 오래 사귄 애인을 배신하다니. 지아의 사전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은근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지아에겐 얼토당토않은 일을 알고 나니 술이 당겼다.
진정 술을 부르는 날이었다.
둘은 곧바로 식탁에 전을 펴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오늘따라 술이 달다.”
지아가 수민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나도. 나도.”
수민이 맞장구쳤다. 그녀는 금세 초롱초롱 순하고 어여쁜 몰티즈로 돌아와 있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지아는 은영의 연애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남의 일엔 일말의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지아였다. 지금은 은영의 몸에서 살아남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지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쳐드는 호기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은영이 남긴 기록엔 민선혁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마傷으로 은영이 일부러 없앴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기록하지 않았을까.
정보를 좀 더 캐내야 했다. 수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친김에 수민을 살짝 도발할 필요가 있었다.
“수민아. 그 와이프 반지 봤어?”
지아가 넌지시 먹잇감을 던졌다.
“어. 그 핑크 다이아. 엄청 비싼 거던데. 일부러 우리에게 보란 듯이 제스처 취하는 거 같지 않았어? 민선혁 그 자식, 로스쿨 학비도 없어서 네게 손 벌렸던 놈이. 그런 예물을 해줬단 말이지. 생각하니까 다시 뚜껑 열리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곤 수민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넌 어쩌자고 그런 놈한테 그렇게 헌신적이었던 거야. 하아~~ 하긴. 어릴 땐 나도 그놈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 내 잘못이야. 그놈이 다리 놔달라고 했을 때 외면했어야 했는데……. 괜히 오작교 하는 바람에…….”
수민이 아련하게 과거를 돌아보는 눈치였다.
“네가 뭔 잘못이야. 좋아한 내 탓이지.”
지아는 한 번 더 수민을 자극했다.
“그 자식이 너 일 년 내내 졸졸 따라다녔잖아. 자주 봐서 정든 거잖아. 나도 그래서 그놈 두둔했던 거,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과할게. 내가 진짜 미안해.”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좀 전의 그 의기양양한 민선혁의 태도는 왜일까. 얼마나 은영을 우습게 봤으면 저럴 수 있을까. 지아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
눈을 떠보니 이상하게 몸이 상쾌했다. 간만에 부어라 마셔라, 끝까지 달렸는데 어쩜 이리 몸이 가벼울까.
지아는 거울부터 봤다. 은영의 얼굴엔 부기 하나 없었다. 신기했다.
얜 술이 체질인가 봐.
늘 쪼금 먹고 쪼금 마시며 운동만 많이 했던 지아는 일반인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 왔었다. 인형처럼 예뻤지만 배우의 삶은 고단했다. 꼬꼬마부터 시작됐던 식단 조절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그런데 지아의 몸이 땅에 묻히고 나서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어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단에 대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음식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손등을 때리던 회초리도 없었다.
수민은 만취 상태에서도 파를 송솔 썰어 넣은 라면에다 달걀까지 곁들여 끓여다 줬고 편의점에서 사 온 안주를 다 먹어 치워도 말리지 않았다. 어떤 잔소리도 없었다.
새벽에 출출하다며 치킨까지 배달시켜 먹은 것 같은데 아쉽게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거실로 나가보니 어제의 잔해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식탁엔 놋쇠로 만든 칠 첩 반상기가 놓여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기름이 좔좔 흐르는 잡곡밥에 콩나물국, 멸치조림, 장조림 등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었다.
이거 황후의 밥상 아냐?
황송한 마음에 얼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아. 그런데 수저 옆에 쪽지 하나가 있었다.
-난 한강 둔치 한 바퀴 돌고 올게.
밥 먹고 쉬고 있어.
어제 괜히 내가 백화점 가자고 해서 못 볼 꼴 보게 했네.
네가 더 속상할 텐데 내가 막말해서 미안해.
이 가방은 나의 마음이야.
이제부터 예쁜 것만 들고 다녀.
그리고 그런 놈은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너의 벗 수민~~~
지아는 옆 의자에 놓인 푸른색 서류 가방을 보았다. 어제 수민이 백화점에서 급하게 결제하고 들고 나온 그 가방이었다.
지아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며시 품에 안았다. 가방에서 고급스러운 향이 났다. 가방의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아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은영은 그랬을지 몰라도 난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