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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06. 2024

첫 출근

  처음은 언제나 떨린다. 베테랑 배우인 지아도 매해 첫 공연이면 긴장에 긴장을 더했다. 그런 지아 앞에 지금은 상상한 적도, 구경해 본 적도 없는 변호사로서의 첫 출근이 기다리고 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살면서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변호사를, 심지어 그 역할을 직접 해내야 하다니…….      


 속이 답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주 월요일이 오지 않도록 시계추를 매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붙잡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하루는 너무 빨리 지나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아는 새 배역을 맡았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로부터 이 배역을 배울 수 있을까. 어디 교재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 번개에 맞은 듯 번쩍, 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맞다. 그게 있었지, 하고선 곧바로 드라마를 검색했다. 배우다운 발상이었다.      


 지아는 십 년 전 한창 인기를 끌었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찾아 1화부터 18화까지 밤새워봤다.      


 여자 주인공은 은영과 수민보다 더 변호사스러운 외모였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끼며 지아는 변호사의 복장, 말투,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지아는 훌륭한 배우였기에 이미지를 흉내 내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드라마를 보며 이 정도면 충분히 따라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는 법적인 지식 없이 어떻게 사건을 처리해 나갈 것인가였다.

     

 심지어 드라마 여자 주인공 장혜성 변호사에겐 엄청난 조력자도 있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자라니. 그런 조력자가 있으면 얼마나 든든할까.     


 지원군을 둔 장혜성이 부러웠다.     


 흐음~~~      


 지아의 고민이 깊어졌다.      


 다음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드라마를 찾았다. 재작년에 흥행했으나 바빠서 보지 못한 드라마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피곤한 상태에서도 16화 드라마를 단번에 해치웠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오도록 집중해서 봤다. 영우는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며 깜찍하기까지 했다.      


 내가 저 배역을 맡았다면 어땠을까. 지아는 변호사에 대한 정보수집 차원이었던 원래의 목적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박은빈을 샘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드라마 속 영우는 포토그래픽메모리, 한 번만 보면 모든 것을 외워버리는 능력을 가진 천재였다. 그 때문에 영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졌음에도 남들보다 변호사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틱했다.


 지아는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끼,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감각 때문에 이제껏 많은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신에게 쏟아진 과분한 애정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하늘은 공평해서 한 인간에게 모든 재능을 몰아주진 않았다. 문득 떠올리고 싶지 않은 학교 성적표가 기억났다. 순간 아찔하게 현기증이 났다. 영화나 드라마의 변호사 배역이야 잘 해낼 수 있겠지만 실제 변호사와 자신은 안드로메다만큼 거리가 멀었다.     


 지아에겐 초능력을 가진 친구도 천재적인 두뇌도 없었다. 헐~~~~ 이제 어쩔?     


 눈이 빨갛게 충혈된 보람이 없었다. 생소한 법률용어에 부담감만 커졌다.     


 대본도 없이 어떻게 저 역할을 소화해 내지?     


 머리에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 눈알이 뽑힐 것 같아 거실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지아가 힘들 때마다 해왔던 자신만의 의식이었다.      


 거실 중앙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선 거꾸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꺄아악!!! 깜짝이야. 너 거기서 뭐 해?”


 늦잠을 자다 일어난 수민이 거실에서 지아를 발견하고선 호들갑이었다.     


 아. 맞다. 오지랖엔 천재적인 친구가 있었지. 지아는 피가 거꾸로 솟아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각 중…….”

 “뭔 생각을 거꾸로 서서 하냐?”

 “태수미 변호사가 입은 옷 같은 건 어디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정신이 없어서 헛소리가 나왔다.     


 “그걸 왜 혼자 생각해? 이 언니를 놔두고.”

 수민이 생기 충만한 얼굴로 다가오며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쳤다.      


 “그건 그렇고 너 언제 요가를 배웠지?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네.”

 하면서 공중에 들린 지아의 발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지아는 아차, 하고선 천천히 다리를 내렸다.      


 “벽 대고 몇 번 서봤더니 잘 되길래 오늘 한번 시도해 본 거야.”

 “하긴, 넌 잘하는 게 많지. 움직이는 건 싫어해도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수민이 말을 이었다.     


 “근데 웬일? 작업복에 관심을 다 가지고? 어제 너답지 않게 하루 종일 드라마를 보더니만 우영우가 아니라 옷에 꽂힌 거였어?”     


 수민에겐 물구나무 선 은영보다 옷에 관심 있는 은영이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 그게 좀 괜찮아 보여서 말이야.”

 “오올~~, 난 대찬성. 제발 너도 이제 좀 인간답게 살아.”


 수민은 바로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쇼핑몰을 검색했다.      

 “이거. 여기서 살 수 있어. 내가 주문해 줄까?”

 “으~응.”


***     


 일주일 전에 와본 곳인데 출근해서 보는 사무실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KNG는 법원 정문과 가까운 법조빌딩의 7층에서 9층까지를 임차해서 쓰고 있었다. 서초동에 빽빽하게 들어선 법무법인 중에선 그리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     


 지아가 출근 준비과정에서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KNG는 중소형 로펌에 불과했지만 소위 전관 변호사라고 불리는 판검사 출신 변호사가 많을 뿐 아니라 국내외 수재들이 구성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실력이 쟁쟁해 승소율이 하늘 높은 줄 몰랐고 깔끔한 일 처리로 법원, 검찰 등 관계 기관 및 의뢰인과 취업준비생에게도 선호도가 높았다.  

    

 이 법인에선 어쏘로 근무한 이력만으로도 변호사업계의 채용 시장에서 인기 1순위를 차지할 정도이니 규모에 비해 인지도는 최상이라 할 수 있었다.    

 

 KNG를 거친 변호사가 (법조 경력을 갖춘 이들을 법관으로 임용하는)경력 법관이 되는 비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배울 것이 많았고 다양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은영의 사무실은 시니어 이상만 사용할 수 있는 9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든든한 우군 수민은 아래층에서 헤어졌다.      


 “그럼 좋은 한 주 되십시오. 김 변호사님.”

  다른 사람들 앞이라 깍듯한 인사를 하고 수민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아는 9층의 긴 복도 입구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마치 낯선 곳에 면접 보러 온 사람처럼, 이제 자신의 일터가 된 은영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맞은편 통창으로 수많은 고층빌딩이 보였다. 저곳엔 저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해 내느라 지아처럼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똑똑똑.     


 책상에 앉자마자 누군가 노크를 했다.      


 “네, 들어오세요”


 지아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칼 정장의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두꺼운 서류가 한가득이었다.    

 

 “변호사님, 휴가 잘 보내셨습니까. 여기 결재하실 서류들입니다. 그리고 두 시에 이명섭 씨와의 상담이 잡혀있습니다.”

 “아, 네.”


 지아가 서류를 받아 들며 여인과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여인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지? 저 눈빛은? 내가 뭐 잘못했나?      


 속으론 엄청 쫄았지만 태연한 척 물었다.     


 “다른 특별한 일정은 없나요?”     


 여인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금세 칼 정장의 그녀 다운 태도로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선 그대로 나가버렸다.      


 휴~~~ 조마조마했네.      


 안도도 잠시, 다시 혼자 남겨진 지아는 어떻게 의뢰인과 상담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2시 전까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마음이 불안해 테이블 옆을 왔다 갔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렸다.      


 그때 창밖에서 주춤하던 햇살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책장 위로 쏟아져 내렸다. 책장엔 상패와 위촉장 외에도 벽돌보다 두꺼운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지아의 인생에선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제목의 책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중 가장 두꺼운 책에 손이 뻗어졌다. 책등에 大法典이라는 금박 글씨가 방금 내려앉은 볕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다. 책을 꺼내 드는데 어이쿠,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그만큼 책이 무거웠던 것이다. 마치 은영이 살아온 삶의 무게를 집어 든 것 마냥…….     


***     


 지아는 점심도 거르고 법전을 읽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한 장 넘겨보았을 뿐인데 글자들이 하나씩 제자리에서 일어나 지아의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마법의 스틱을 흔들고 한 바퀴 돌면 변신이 가능한 요술 공주 밍키나 세일러 문이 된 것만 같았다. 이런 변화가 가당키나 한지 의심스러웠으나 지아가 빙의된 몸이 S대 법대생, 재학 중 합격, 연수원 수석 졸업이라는 타이틀을 겸비한 수재였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얘 에디슨 과였어?     


 한 주간 은영으로 살아본 경험으론 은영은 일상생활에선 심각한 수준으로 어리바리한 편이었던 것 같다. 수민은 하나부터 열까지 은영을 챙겨주는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은영은 법률 분야에 대해선 엄청난 습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놀라운 뇌 덕분에 지아는 생전 처음 보는 법률들을 빠르게 숙지하고 있었다. 조문 아래 예시로 달린 판례까지 쏙쏙 머리에 들어왔다. 법학을 알아가는 것은 완전히 신세계를 경험하는 즐거움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분야가 있었다니, 지아는 시간 가는 걸 잊어버리고 법전에 푸욱 빠져들었다.

    

 또옥 또옥 또옥.     


 신세계의 흐름이 끊긴 것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때문이었다.      


 “아, 변호사님 방해가 되었나요?”


 중저음에 단정한 목소리를 한 남자가 문을 열다 말고는 어정쩡하게 서서 말했다. 지아가 공부에 몰두하느라 생긴 집중의 아우라가 내부 공간을 모두 채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지아의 허락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열기로 가득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싱그러워졌다.     

 

 새하얀 셔츠에 짙은 청색 정장을 입은 그는 절제된 위엄과 유연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다비드상을 연상케 하는 이목구비에 밤하늘처럼 검은 신비로운 눈동자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여태껏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외모의 배우라면 거의 다 만나 봤고 그들 대부분을 잠깐잠깐 찐하게 사귀어보기도 한 지아였다. 그런 지아의 시선을 사로잡은 남성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수려한 외모에 근사한 목소리, 정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 여기다 지적인 분위기까지 갖춘 이성이라니.


 조각 같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지아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청량감이 더해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에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일전에 지시하신 서류입니다. 그리고 이명섭 씨가 도착해서 대기 중입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앗. 네.”     


 지아는 홀리듯 쳐다본 것이 부끄러워 얼른 차가운 눈빛으로 바꾸고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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