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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멸종 동물을 되살리는 방법

아이가 상자 밖으로 얼굴을 쏙 뺐다. 창고형 마트에서 물건을 담아 온 상자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자째 물건을 진열해두는 매장 특성상 한쪽이 넓게 개방돼 있었다. 아이 얼굴이 빠져나오기에 충분한 너비였다. 얼굴을 통과한 상자가 아이의 어깨에 걸쳐졌다.


엄마, 이걸로 공룡 만들래!


공룡 사랑이 한창때만큼은 아니었지만, 한 번쯤 무시무시하게 포효하는 동물의 제왕이 돼 보고 싶었을 거다. 아이가 착용할 수 있으면서 꼬리와 네 발까지 달린 형상을 만드려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다. 우선, 아이가 뒤집어쓴 상자에서 출발해 다음 상자를 이어 나가며 공룡의 몸을 확장시키기로 했다. 정확한 크기며 색깔은 당연히 정하지 않았다. 집에 있는 상자 중에 폭과 길이가 시작 상자와 맞는 걸 찾아서 즉흥적으로 붙이는 식이었다.


첫 번째 상자 밑으로 비슷한 크기의 상자 하나를 더 찾아 연결했다. 공룡 몸통이 아이의 다리 아래로 끌리지 않으려면 상자 두 개로 충분했다. 두 번째 상자 뒤쪽으로 긴 꼬리를 만들 차례. 우선, 몸통 부분과 같은 너비의 상자를 뒤로 이어 붙였다. 이제 꼬리가 점차 좁아지면서 뾰족하게 마무리되려면 상자폭을 좁혀야 했다. 상자 날개면이 평행사변형으로 좁아지게 살짝 잘랐다. 사면의 날개끼리 붙여서 상자의 폭이 보다 오므라들게 만들었다. 오므라든 폭에 맞는 작은 상자를 연이어 붙였다. 역시 그 상자도 뒤쪽 날개면이 평행사변형이 되게 잘랐다. 마지막 상자는 삼각뿔 모양 종이 패키지가 있어서 이어 붙였다. 때마침 유아용 천 마스크를 선물 받았는데 그것의 포장이 삼각뿔로 접힌 카드보드지였다. 필요에 맞게 상자들을 착착 잘 활용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아이에게 공룡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했다. 아이 몸에 꼭 맞게 씌워졌다. 색칠도 안 한 상태였지만 이미 세계 최강 공룡의 위엄이 뿜뿜 발산된 느낌이랄까.



아이의 몸 크기에 맞게 공룡 틀을 잡았으니, 다음으로 색을 입힐 단계가 됐다. 멸종 동물의 피부색은 아무도 모른다. 맘대로 칠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대비를 통해 힘 있고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인디고에서 오렌지에 이르는 컬러감이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칠했다. 아이가 짜 먹는 요구르트 봉지를 입에 문 채 부담 없이 쓱쓱 크레파스 선을 그어 장식을 가미했다. 여전히 뭔가 심심하네. 아이의 종이 상자를 들춰보니 글리터링 색종이가 6장 있었다. 공룡 등에 뿔이 난 것처럼 듬성듬성 붙였다. 날렵한 몸통은 티라노사우르스 같은데, 뿔이 난 건 영락없이 스테고사우르스였다. 그렇다면, 우리만의 공룡은 '스테고-티라노사우르스-렉스'! Roarrr!!!



앗, 너무 이른 포효였나 보다. 다시 보니 다리가 없었다. 앞다리가 유독 짧은 티라노사우르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우스갯소리로, 공룡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1순위는 공룡 박사, 2순위는 5살 남자아이라는 말이 있다. 3순위는 그 아이를 기르는 엄마일 거다. 이미 5살, 6살을 거쳐 7살이 된 남자아이를 둔 집이라면 공룡 백과사전쯤은 갖춰 놓고 있어야 한다. 그 아이의 엄마라면 티라노사우르스의 앞다리 길이 정도는 눈 감고도 안다.


공룡 다리가 움직이게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작업 과정이 단순해야 했다. 어른보다 인내 시간이 짧은 아이와 복잡하고 고단한 작업을 끌고 가긴 어려웠다. 무엇이든 다 있는 가게에서 자석 단추를 사 왔다. 산타옷을 만들 때 써 본 게 떠올랐다. 공룡 다리의 관절 부분을 자석 단추로 연결하면 무릎을 굽혔다 펴는 것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또한 공룡 무릎이 접힐 경우, 아이가 공룡을 입으면 다리가 길어지고 바닥에 벗어 두면 자연히 다리가 구부러지게 할 수 있었다. 작품 보관에도 용이할 것이라 예측됐다. 공룡 다리를 무릎 관절 위아래로 나눠서 상자에 그리고 오렸다. 각각에 자석 단추 음양 부분을 나눠서 고정시키고, 똑딱똑딱 잘 붙는지, 실제 다리처럼 앞뒤로 잘 움직이는지 실험해봤다. 거침없이 잘 움직였다. 혼자 흡족해서 아이디어 굿!, 을 읊조렸다. 마무리를 위해 몸통과 같은 톤으로 다리 색을 입혔다.



근데 공룡 머리는? 머리가 없잖아! 우리 집에 모자처럼 쓸 수 있는 공룡 머리 인형이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공룡의 입 한가운데 들어가도록 쓰는 일종의 탈 같은 구조였다. 오, 나이스! 머리는 저걸로! 무계획 속에 즉흥적으로 어우러지는 절묘한 하모니의 결과물이랄까. 본능 즉흥파에게 필요한 건 집구석 어딘가에서 그때그때 나왔다. 택배 상자가 때마다 쓰임에 맞게 발견된 것처럼 말이다. 대망의 착용 시간!


엄마, 무거워. 벗을래.


이번에도 5분 30초의 룰이 깨지지 않는 건가. 너는 매번 만들자고 하고 벗는구나.... 우리 신나게 만든 거 아니었늬??? 가을도 아닌데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느낌이랄까. 무겁다는 말 때문에 다시 한번 공룡을 훑어보니, 꼬리 맨 끝에 달린 삼각뿔까지 합해서 총 5개의 상자를 아이의 어깨에 짊어지게 한 격이었다. 착용자의 연령을 고려하지 않은 무게 조절 실패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 택배 상자니까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상자 세상에 상자는 넘쳐난다. 다음엔 우리 제대로 만들어 보자!


아이는 언제 공룡이 무거운 적이 있었냐는 듯, 밖에 나가면 사람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우리 집에 공룡이 있어요!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공룡이에요!' 어느 날 나는 어린이 작품을 실어준다는 신문 기사를 발견했다. 아이가 공룡으로 변신한 모습을 사진 찍어 보냈다. 바로 당첨! 신문 귀퉁이에 자그마하게 흑백 사진이 실렸다. 중간중간 이런 깨소금 재미를 누리는 맛에 어느새 다음 작품을 쓱싹쓱싹 칠하고 오리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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