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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거인, 로봇, 상상하는 무엇이든

마감 시간 있어?


출근 준비를 하려고 새벽에 일어난 남편이 물었다. 나는 출근하는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택배 상자를 칠하고 있었다. 전날 밤 잠자리에 누우면서도 일어나고 싶었다. 빨리 작품을 완성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잠만보 아내가 새벽부터 상자를 잡고 앉아 있으니, 부스스 일어난 남편이 놀랠 수밖에 없었다. 재밌어서,라고 답했다. 나는 몰입의 즐거움 가운데 있었다.


이번 작업은 아이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아이가 본인이 탑승할 수 있을 만큼 큰 로봇을 만들자고 했었다. 내부는 출동 본부로 쓸 거라고 했다. 거실에 키오스크 랩이 있는데 본부로 쓸 만한 규모의 로봇이라니, 더 이상 집안에서 여백의 미를 기대하긴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거실에 키오스크 랩과 로봇을 나란히 세워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꽉 차 보였다. 아이를 설득했다. 아쉽지만 키오스크 랩은 해체하고 로봇으로 아지트를 대체하자고 했다. 탑승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생기는 거라고 한껏 분위기를 띄웠다. 아이는 생각보다 흔쾌히 그래, 하더니 별 수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작품을 설치했다면 언젠가는 해체해야 한다. 해체도 예술의 일부다. 뱅크시(Banksy)처럼 의도한 퍼포먼스(예술 행위)였다면 좋겠지만, 실상은 거실 생활권 확보를 위한 필사의 행위였다.


탑승한다는 느낌이 들려면 적어도 한 두 칸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려면 로봇이 아이 키보다 커야 했다. 1인용 본부 느낌이 날 만큼 아담한 사이즈의 공간도 마련돼야 했다. 완성될 크기를 어림 잡은 후 상자를 꺼냈다. 이번에도 사과 상자보다 1.5배 큰 것을 8개 꺼냈다. 늘 하던 데로 이음매를 뜯어 길게 펼친 후 접착제로 연결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이 단계 때마다 거실 바닥이 상자로 가득 덮였다.



가로로 4개씩 2줄로 이어 붙인 상자를 세워봤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도 옆에 세웠다. 아이 키보다 높으려면 상자 한 줄이 더 얹어져야 할 걸로 보였다. 이미 붙인 상자는 로봇의 다리 부분으로 쓰고, 위로 높일 상자는 가슴 부위가 되게 해야겠다고 방향을 잡았다. 나는 철저한 계획 하에 작업에 들어가기보다는 작업 중간에 다음 방향을 찾아가는 게 좋았다. 그런 면에서 택배 상자라는 재료가 부담 없고 편했다.


앞에서 봤을 때 로봇이 살짝 다리를 벌린 채 늠름하게 선 것처럼 보이게 상자를 접었다. 옆면과 뒷면도 만들어지게 접어서 1인실 규모의 방처럼 상자 벽을 둘러쳤다. 그 위에는 다리 부분에 쓰인 것보다 작은 상자 2개를 이어 붙여서 가슴 부위용으로 얹었다.



나와 아이의 택배 상자 작업은 구상부터 완성까지 대개 2~3주의 시간이 소요됐다.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평면 작업보다 긴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상자를 붙이는 작업은 아이가 하원하기 전에 해놓곤 했다. 그 과정까지도 아이와 함께 하면 좋겠지만, 우선은 아이가 이미 붙여진 상자면 위에 다양한 미술 기법과 재료를 실험해보고 미술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알만 한 외형의 로봇보다는 다른 형식이 없을지 고민했다. 아이가 로봇을 만들자고 했을 때 조금 색다른 접근을 해보고 싶었다. 갑자기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본 조각상이 떠올랐다. 기숙사 건물에서 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던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의 작품 '서 있는 야수 기념비(Monument with Standing Beast, 1984)'가 그것이었다. 유학 당시 내가 살던 기숙사는 시카고의 초중심지인 루프(Chicago Loop)에 위치해 있었다. 시카고는 건축의 도시답게 건물은 물론이고 그 앞에 세워진 유명 작가의 조각상을 보는 재미를 남다르게 선사해줬다. 루프 지역에 초고층 빌딩이 밀집돼 있던 덕분에 블록마다 시선을 잡아 끄는 작품들이 즐비해 있었다. 관광객들은 시카고 문화청에서 제작한 '시카고 공공미술 안내' 책자를 참고해서 거리의 작품을 감상하며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로지 흰 면과 검은 선의 대비로 이뤄진 뒤뷔페의 작품은 강렬했다. 건물, 숲, 아니면 미로일까. 조각은 폐쇄적이지 않았다. 안팎을 오갈 수 있는 열린 형태였고, 행인의 발걸음을 자연스레 건물 앞으로 옮겨놨다. 뒤뷔페의 작품은 그라피티나 캐리커처에서 영감을 얻은 일종의 다듬어지지 않은 도시 스타일을 활용해 거리의 관객을 초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뒤뷔페의 비정형화된 세계를 마주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때 본 '서 있는 야수상'을 머릿속에서 소환해냈다. 여기에 더해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사하는데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했다. 아이와 뒤뷔페의 작품을 들여다보며 우리만의 로봇도 만들어 나갔다. 본능에 충실한, 규격화되지 않은 거대한 존재를 시각화했다. 흰색으로 칠한 면 위에 검은색으로 그은 선. 다시 흰색, 검은색, 흰색, 검은색. 계획도 의도도 없는 반복적인 행위가 잡념을 없애 줬다. 아이에게 작품 위에 마음대로 낙서하라고 했다. 작품을 손대지 말아야 할 어려운 대상으로 보지 않게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해도 돼?,라고 묻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붓펜을 쥐고 제 맘대로 쓰고 그렸다.



거인 로봇은 목부터 팔, 다리까지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춰 갔다. 머리는? 로봇에 고정시키기보다 아이의 얼굴에 탈처럼 씌우면 재밌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탈을 쓴 아이가 2칸짜리 계단에 올라서서 짜잔, 하고 얼굴을 드러낼 때 비로소 거인 로봇의 모습이 온전해졌다. 이번 작품도 역시 영상에 담았다. 거인 로봇 얼굴의 탈을 쓴 아이가 본부 안에 들어가서 계단을 밟고 점차 올라서는 장면을 찍었다. 다음으로, 탈 쓴 아이가 로봇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까지 총 두 가지 버전을 촬영했다. 간단하지만 재밌는 퍼포먼스였다.



아이가 로봇 겸 본부를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분주하게 설치했다. 그중에는 나름 출동 지시를 내릴 때 쓸 카드보드지로 만든 노트북 컴퓨터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든 형상은 거인 혹은 로봇, 구름 인간 혹은 솜사탕 인간, 미쉘린 혹은 그 무엇이든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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