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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너와 나의 안개 한 방울

기억은 '키오스크 랩'의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남기진 않을 거다. 아이의 기억 속엔 본인의 키보다 높게 둘러싼 것, 상자에서 났던 먼지 냄새, 안쪽에 쓴 낙서, 본인을 찾으러 왔던 엄마, 아빠의 얼굴 같은 단편들, 혹은 이보다 훨씬 일부만 새겨질 수 있다. 내 기억 속엔 아이와 함께 색을 칠한 장면, 아이가 자신을 찾아보라고 부르던 목소리, 상자 속에서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던 천진난만한 표정 같은 게 남을 거다.


각자가 간직한 공간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회상할 날이 올 거다. 그때 서로 다른 기억의 조각을 선물처럼 상대에게 건넬 수 있길 바란다. 지금까지 나의 길지 않은 날들을 되짚어 보면, 숨을 쉴 때 공기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숨 쉴 공간도 필요했다. 실재했던 공간, 기억 속에 남은 공간, 마음을 기대 쉴 공간이 있을 때 더 고른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게는 기대 쉴 수 있는 공간이 범위를 제한할 수 없는 자연이 되기도 했다. 나는 문득 먼 산을 바라보다 살며시 초점이 흐려질 때가 있다. 어느샌가 내 온 피부가 희뿌연 안갯속에 서늘히 감싸였던 유년의 한때를 마주했다. 해발 1,004미터 한계령 정상을 메웠던 농밀한 수분이 다시금 감촉될 듯 떠오를 때 마음에 해방감이 찾아오곤 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한계령을 넘어 동해로 피서를 가곤 했다. 여행의 기억은 목적지에서 보낸 시간보다 목적지를 코 앞에 둔 고갯길 정상을 새겨두고 있었다. 산 꼭대기를 감싼 안개는 여행의 설렘을 정점에 가 닿게 했다.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른 수분 방울들이 살갗에 닿는 순간 토독톡톡, 연달아 터져 나갔다. 지면의 열기로 달아올랐던 몸은 어느새 한여름을 면제받은 한기 서린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아슬아슬 넘어야 바다를 손에 쥘 기회를 주었던 곡예 길, 그 정상에 걸터앉은 숱지은 안개. 구름 속인지 바다 속인지 앞을 더듬어 알던 굽이 위에 내 최초의 여행이 자리해 있다.


아이의 가슴속에 안개 한 방울 같은 기억을 남기려고 상자를 꺼냈다. 내가 한계령 정상을 메운 안개를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처럼, 아이 역시 작품을 완성해가는 본 과정보다 한창 작업을 시작하려는 분주한 거실 풍경을 더욱 설렘 가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아이 속에 남을 단 한 장면이 넓게 펼쳐진 상자 자체가 될지, 그 위에 앉아 있던 모습이 될지, 망칠 걱정 없이 그은 단 한 번의 붓놀림이 될지 알 수 없다. 수분 방울처럼 지극히 미세한 것일지라도 마음속에 두고두고 자유함을 맛보게 할 어떤 것을 남겨주고 싶다. 그 어렴풋한 기억의 단편을 아이와 두고두고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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