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뿌아르다!
아이가 팝아티스트 제프 쿤스(Jeff Koons, 1955~)의 벌룬독(Balloon Dog)을 볼 때마다 '뽕뿌아르'라고 외쳤다. 미술관 아트샵이나 인테리어 소품 가게에 벌룬독이 비치돼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색깔 별로 열 개쯤 진열된 장식장 앞에서 하나, 둘, 세어 가며 반가워했다.
우리가 읽은 그림책 『최고 예술가는 바로 나야!(매리언 튜카스 글그림)』에는 벌룬독의 이름이 '뽕뿌아르'로 붙여져 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팝아트를 쉽고 유쾌하게 설명해놓은 작품이었다. 특히, 뽕뿌아르가 펑 터져버리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작품이란 걸 알고 있던 내 머리를 펑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어쩌면 풍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작품이 터져버렸다는 점에서 나처럼 놀랐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뽕뿌아르가 터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 책을 읽고 또 읽고 나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의 벌룬독을 그렸다. 이번에도 역시 길게 펼친 택배 상자 위에 말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벌룬독은 무수히 많은 색으로 재해석돼 있다. 우리의 택배 상자 위에서도 우리만의 색을 입힌 벌룬독을 완성해 갔다. 아이는 벌룬독을 그린다고 들떴고 이 색, 저 색을 붓에 묻혀 칠했다. 나는 벌룬독이 스틸 재질처럼 빛 반사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게 몇 개의 라인만 추가해서 넣어줬다. 아이는 살아 움직이는 강아지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SNS에 올렸더니 책을 지은 튜카스 작가가 '원더풀'이라고 댓글을 달아줬다.
우리만의 색깔 탐구는 한밤중 침대 위에서도 계속됐다. 아이는 자려고 누우면 바로 자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한 시간 넘게 얘기하다 자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제 정말 자야 한다고 타이르면 본인도 그러겠다는 의미로 묻는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한 동안 이 질문을 반복해서 하곤 했다. 오늘 밤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신호 같은 이야기, 색 이야기였다.
아이: 빨강이랑 노랑을 섞으면 무슨 색이 돼?
나: 주황
아이: 빨강이랑 노랑이랑 파랑이랑 보라랑 검정이랑 핑크랑 회색이랑 초록이랑 다 섞으면 뭐가 돼?
나: 물감으로 색을 섞으면 섞을수록 검은색에 가까워져.
나는 아이가 본인만의 벌룬독을 칠할 때든, 색에 관해 궁금해할 때든, 아이만의 색을 칠하며 자라길 바랐다. 내 색이 아닌 남의 색까지 섞느라 어둠의 검정 속에 인생을 집어넣는 일이 없길 원했다. 어둠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사색하게 만드는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한 밤일 수도 있지만, 억지로 섞은 색이라면 고요할 리가 없다. 누구나 눈을 통해 색을 받아들이지만 저마다 그 색에 대해 갖는 경험과 기억은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환경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색은 각기 다른 빛깔의 이야기를 빚어낸다. 아이도 나도 각자만의 색을 발하길 바랐다. 남의 역할은 이미 누군가가 하고 있다(Be yourself; everyone else is already taken. - Oscar Wilde)는 사실을 기억하면, 마음속 어수선한 잔가지를 잘 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두 아이와의 사귐을 위해 택배 상자 미술 놀이를 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아이는 내 아이이고, 또 다른 아이는 나의 내면에 숨겨둔 아이였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귄다고 말할 때 '사귄다'는 건 만나는 상대를 깊이 알아간다는 뜻과 같다. 나는 부모 자식 관계에도 사귐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낳아서 키웠다는 말로는 사귈 수가 없다. 나는 아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귀며 알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귀기 위해 택배 상자를 활용한 것뿐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내면에 숨겨둔 아이도 만나게 됐다.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끄집어내게 됐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 동네 우체국에서 소포를 부쳤었다. 대부분 미술 서적이었고, 중간에 간단한 미술 도구를 껴놓은 상자였던 걸로 기억한다. 책이 무거워서 가방 무게가 초과되기 십상이니 소포로 보내 놓고 현지에서 받으려는 계획이었다. 나는 시카고에 잘 도착했고, 한 학기를 거의 마무리해 갈 무렵 기숙사 사무실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소포를 찾아가라고 쓰여 있었다.
소포? 이상하다... 한국에서 소포 보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는데?
내가 출발 전에 상자를 붙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배편과 비행기 편에 싣는 소포의 가격 차이가 상당히 컸다. 당장 필요한 짐이 아니라서 배편에 붙였고, 도착까지 한 달 정도 걸릴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세 달이 지나서야 도착한 소포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했고, 모서리는 여기저기 치여서 짓눌렸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어딘가의 도장도 찍혀 있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모양새였다. 짐을 풀기 전에 먼저 세탁기에 넣고 빨아줘야 할 것처럼 지저분했다. 어디서부터 누구 손에 의해 목적지가 꼬인 건 지 알 수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소포 상자를 열어보긴 했지만 유학을 마칠 때까지 그 안에 든 책을 보지도, 그 안에 든 도구를 사용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상자는 나다. 사면을 꼼꼼히 닫아 테이핑 한 모습도 나 같고, 테이프를 뜯어서 열어젖힌 모습도 때로는 나 같다. 속에 채워 넣은 것을 열어 보이지 않아 곰팡내를 풍기기도 했고, 쌓인 먼지를 털어서 열고 보니 별 거 아닌 모습이기도 했다. 열어라, 말아라, 제발 옆에서 성가신 간섭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인생 청소 기간에 자의 반 타의 반 열어 보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상자 속에 허상을 담고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막상 열어 보니 기억하고 있던 바와 달랐다. 내가 쟁여 놓은 걸 열어서 쓰지 않으면 결국 쓰레기가 된다. 나를 다 써버리자, 속시원히 훌훌 비워 버리자고 다짐했다.
내 아이가 훗날 엄마가 가고 나서 보니 못 보던 상자가 많이 나왔다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어느 구석에서 생전 처음 보는 상자가 발견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상자를 다 열었어,라고 얘기해줬으면 좋겠다. 거기에 덧붙여서 엄마는 상자를 다 뜯어서 썼어,라고 얘기해주면 더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달리기 에세이에서 묘비에 남길 문장을 얘기한 바 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상자를 열어서 다 비웠다'라고 쓰면 될까. 하루키의 문장만큼 멋있지 않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말이다.
아이와 택배 상자로 사귀어 가는 시간이 좋다. 우리가 사귀는 동안 아이는 나를 미소 짓게도 하고 예술 짓게도 만들었다. 어느 날 아이가 택배 상자를 꺼내 오더니 뽑기 기계를 만든다고 요란하게 움직였다. 내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들게 내버려 뒀다. 상자 안에 반짝이는 바닥지도 깔고, 말랑이가 담긴 투명하고 둥근 뽑기 통도 여러 개 넣고, 기계에 동전을 넣을 수 있게 구멍도 뚫느라 분주했다. 아이는 일상을 재밌게 탐구해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로 인해 일상을 예술로 탐구하는 재미에 빠져 갔다. 우리는 인생을 예술적으로 탐험하는 듀오 아티스트이고, 우리의 작품은 앞으로도 원더풀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