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애정하는 가족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손님 세 식구와 우리 세 식구가 모인 자리는 할 말 많고 화기애애했다. 모임의 마지막은 미술 놀이로 장식했다. 손님과 미술 활동을 했다는 게 의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아이와 나의 택배 상자 놀이를 재밌게 봐줬던 가족이라 어색할 건 없었다. 한 번쯤 아이들과 다다 놀이를 해보고 싶었고, 여럿이 모여야 할 수 있는 활동이었기에 때마침 좋았다.
다다이스트(Dadaist)가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뇌를 말랑말랑하게 만들고자 함께 모여 했다던 놀이였다. 다다이스트는 이성에 지배받지 않는 유연한 사고로 작업하기 위해 놀이하길 좋아했다. 그들의 작업 자체가 일종의 놀이였으니 몸풀기 놀이를 하고 나서 진짜 놀이를 한 셈인가.
우리가 한 다다이스트의 놀이는 초상화 그리기였다. 예상했겠지만, 일반적인 초상화는 아니었다. 먼저, 전지 정도 되는 큰 종이를 준비했다. 종이 위에 모델이 될 사람의 얼굴이 꽉 차게 그려질 예정이었다. 종이는 8칸으로 나눠지게 한 방향으로 접었다. 모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종이 앞에 한 줄로 섰고, 차례대로 각 칸에 들어갈 얼굴 일부를 그리는 것이었다. 단, 본인이 그린 칸은 뒷사람이 보지 않게 뒤로 접어 넘겨야 하며, 어디까지 그렸는지 알려줘서도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모델로 자원한 사람은 아이 친구의 아빠였다. 아주 갸름한 얼굴형을 가진 아버님은 커트 머리에 둥근 테 안경을 썼다. 모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지를 펼친 책상 뒤에 줄을 섰다.
첫 번째 칸입니다.
나는 시작을 알렸다. 우리 아이, 아이의 친구, 친구의 엄마, 남편과 내 차례 때마다 몇 번째 칸인지 알려주었고, 이쯤 되면 얼굴의 어느 부위를 그려야 할지 각자 속으로 가늠해가며 그려 갔다. 모델 아빠는 자신의 아이가 자기를 어떻게 그릴지 예의 주시했다. 아빠가 그렇게 생겼어??, 하니 아빠 이렇게 생겼잖아!!,라고 딸아이가 되받아 쳤다. 장난스레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우리 아이가 자기도 모델을 하고 싶다고 보챘다. 두 번째 전지를 펼치면서 분명 얼굴만 그릴 거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아이가 고난도 포즈를 잡느라 요란했다. 몸은 안 그릴 건데... 쩝.... 전설적인 모델의 자세를 관람하는 것도 다다 놀이의 의도치 않은 재미였다.
결과물들은 어땠을까. 그린 사람도 궁금해했지만, 모델로 섰던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서 궁금해했다. 우리는 종이에 그려진 모습이 얼굴 그대로가 아닐 거라고 예측하면서도 도무지 얼마나 어떻게 다를지는 알아맞힐 수 없었다. 가장 나이 어린 우리 아이는 어쩌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을 거란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종이 위에는 코가 두 개, 콧구멍이 네 개, 눈썹도 네 개, 얼굴 크기는 칸마다 제각각인 누군가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다다 놀이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게 가장 재밌었다. 각자가 보고 있는 부분이 다르고 눈여겨 관찰하는 지점이 달랐다. 예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종종 유쾌하게 허를 찌른다. 두 아이는 어떤 걸 봤을까. 아이들의 네 눈동자 속에는 어떤 얼굴이 보였을까. 머릿속에 신선한 자극이 갔을까, 즐거웠을까, 궁금했다.
아이와 나만의 미술 놀이가 이웃에게로 확장됐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랐다. 20~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아주 간단한 레크리에이션이었지만, 맨 처음 택배 상자를 박박 뜯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릴 때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