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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2. 2023

부드럽지 않아도

크로스핏이 무릎 골골대는 아줌마가 하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운동은 아닐 거다.


크로스핏을 시작한 건 다소 연관성 없어 보이는 풋살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에 체육을 좋아했던 나는 10대 당시의 몸과 40대 현재의 몸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겼나 보다. 푸석한 머리칼을 묶고 고등학교 체육 시간의 열기를 떠올리며 여성 풋살 클럽에 입단했다. 풋살장에 하나, 둘 들어서는 여성들은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잠시 흠칫 놀랐지만 취미 삼아 하는 운동에 나이가 있나, 하고 개의치 않았다.


개의했어야 했나. 첫 등판에 발가락으로 슛을 날려 엄지발톱이 날아갔다. 두 번째 출석일에 무릎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증상을 무시하고 세 번째 참석했다가 무릎 위쪽이 냉면에 얹은 반쪽짜리 달걀처럼 튀어나왔다. 관절에 연결된 다리가 마치 야구 응원 막대 풍선 같았다. 아주 빵빵하게 부어올라 웬만해선 접히지 않았다. 소싯적 학교 운동장에서 공 좀 차던 정도를 가지고 자신만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무릎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나이는 숫자가 말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 들어 성숙한다는 건 팩트를 겸허히 체크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일 거다. 성숙도가 나이에 정비례하지 않은 나는 알을 품은 무릎과 발톱 잃은 엄지발가락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축구하는 조카와 같은 감각 이모로 소통하고 싶었는데 발감각 이모가 된 게 아쉬웠다.


그 무렵 우연히 접한 의학 뉴스에서 사람의 몸이 40세와 65세에 큰 변화를 겪는다는 내용을 봤다. 의학적으로 나이 들면서 겪는 변화라는 건 당연히 '노화'를 뜻한다. 알고 보니 해당 내용이 '생애전환기'라는 단어로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었다. 사전에 명시될 만큼 객관화된 사실을 나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나 보다. 나라는 사람의 몸뚱이는 전환을 맞이한 것이었다.


무릎은 둘째치고 맥도 안 짚인다고 말하며 어두운 표정을 짓는 한의사 앞에서 여전히 나는 어떻게 육체가 뛰어지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랜만에 달렸다고 비실대는 몸 상태가 맘에 안 들었다. 사실 가뿐하게 ‘오랜만’이라고 말하기에는 그토록 격렬하게 뛴 것이 십여 년, 어쩌면 이십여 년만일 수도 있어서 양심 없는 단어 선택이긴 하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순순히 노화를 받아들이는 중년의 아줌마로 살아가야 한다는 건 꽤나 떫은 얘기다. 텁텁하고 매끄럽지 않아서 목구멍으로 쉽게 넘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의 상태와 나의 희망과 한의사의 회색 얼굴을 종합해 봤을 때, 무릎이 회복되면 풋살장에 복귀하기보다는 중강도 근력 운동을 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릎을 다친 건 근육이 잘 받쳐주지 못해서다. 근육을 '단련'하는 것을 넘어서 '사수'해야 할 절박성마저 느꼈다. 마흔은 불혹이 아니라 미혹이었다. 근육 없음에 몸도 정신도 휘청거렸다.


치료를 받기 위해 클럽 탈단 수순을 밟던 중 제작이 지연됐던 풋살 유니폼이 도착했다. 'A가 안되면 B를 해보지 뭐.' 너무 축구 선수스러워 보이는 상의는 접어 두고, 검은색 트레이닝 반바지와 흰색 니삭스를 착용하고 크로스핏 체육관에 갔다. 한의원 침상에서 침을 맞으며 풋살러의 꿈을 접은 지 한 달 만이었다.


크로스핏을 하러 가는 길에 멧돼지가 떠올랐다.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게 크로스핏 스타일 아닌가? 유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멧돼지스러운 운동 아닌가? 몇 년 전 신도시에 살 때 산책로에서 ‘멧돼지 출몰 주의’라는 배너를 본 적이 있다. 야산에서 먹잇감을 구하지 못한 멧돼지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산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내려와 보니 먹을거리 많던 논밭 시골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빵 부스러기도 없는 아파트 숲으로 변한 데 분노해서 지나가던 시민을 들이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배너 하단에 작은 글씨로 유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멧돼지에게 절대로 뒷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문구였다. 나와 남편과 아이는 뒷모습을 보이지 않으면서 멧돼지의 시야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했다. 아주 서서히 뒷걸음질하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산책길 위에서 문워크를 연습했다.


멧돼지 같은 크로스핏과 마주한 첫날, 붉은 천을 든 투우사처럼 비장한 각오로 나아간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무너지는 근육과 바스러지는 마음이 멧돼지떼처럼 달려드는 것을 제대로 피하고 싶었다. 잘 피하는 것도 기술이니까. 크로스핏이 문워크일지 몰랐다. 나는 제대로 문워크를 하기 위해 크로스핏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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