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넘게 팔을 접지도 들지도 못한 적이 있다. 팔 굽혀 펴기(Push-Up) 100회가 포함된 걸스 와드 ‘엔지(Angie)’를 하고 나서다. 정식 팔 굽혀 펴기를 못하는 팔알못인 나는 웨이브 푸시업(Wave Push-Up)으로 대체해서 진행했다. 일반 푸시업은 상하체를 바닥에서 띄운 상태로 팔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전신 코어 근육의 힘이 필요한 반면, 웨이브 푸시업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시작해서 팔을 펴고 굽힐 때마다 상체부터 하체까지 파도를 타듯 올리고 내리는 방식이라 힘의 측면에서는 부담이 덜 하다.
여타 와드보다 월등히 많은 ‘100’이라는 숫자를 보고 순간 놀랐지만 할 만한 와드일 거라 치부해 버렸다. 인간이라면 할 수 있으니까 적어놨겠지, 횟수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와드를 할 때마다 베테랑과 나는 한참 다르다는 걸 체험하면서도 순간 기억을 상실했는지 멋모르고 용감했다. 역시 나는 직접 몸으로 부대껴 보지 않으면 감을 잡지 못하는 매우 육체적인 인간이다. 그런 까닭에 크로스핏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나 보다.
십여 년 전 의류학을 전공으로 대학원에 다닐 당시, 어느 수업의 교수님이 열댓 명 남짓한 수강생에게 과거로 돌아가 다른 전공을 택한다면 뭘 하겠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한 분야를 보다 심도 있게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한 번쯤 맞닥뜨리는 전공에 대한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풀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신 셈이었다. 대개 수업 내용이 기승전인생 이야기로 흘러가곤 했던 정년을 앞둔 노교수다운 질문에 누군가는 수학과, 또 누군가는 법학과를 선택했을 거라고 답했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체육학과에 갔을 거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여기저기서 풉, 하고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진심이었다. 몸을 움직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덧붙였다. 교수님은 이해가 간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친분이 있는 어떤 교수가 오래전 해외 대학의 교환 교수로 가는데 무용과로 갔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교수도 나와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했다. 나라는 존재는 근육에 균열이 나고 그로 인한 아픔이 가해져야만 아, 뭔가 일이 즐겁게 진행되고 있구나, 하고 여기는 사람인가 보다. 누군가는 운동 참 미련하게 하는 친구라고 말할 법하다.
20분 동안 차례로 풀업(Pull-Up, 턱걸이) 100회, 푸시업(Push-Up, 팔 굽혀 펴기) 100회, 싯업(Sit-Up, 윗몸일으키기) 100회, 에어 스쾃(Air Squat) 100회를 해야 하는 와드에서 마지막 스쾃까지 가지 못하고 제한 시간이 종료됐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종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던 정도로 팔 근육이 뻑뻑하고 빵빵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짐에 따라 팔을 들 수 있는 높이도 점차 하향 조정됐다. 그날 밤 머리를 감는데 팔을 가슴 높이 이상 들 수 없었다. 팔이 머리 위로 안 올라가면 반대로 머리가 팔에게 내려가게 하자는 해결책을 마련했다. 임기응변에 강한 나 자신이 그 와중에도 대견했다. 엉거주춤 접은 팔을 허리춤에 댄 채로, 1차로 목을 접고, 2차로 허리를 굽혀서 머리를 팔에게로 데려다줬다. 손과 팔에 힘을 줄 수 없는 상태에서 샴푸통의 펌프질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윽,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근육통 앓는 외마디 고통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엔지씨, 강도가 좀 세군요.'
크로스핏에 공헌한 여성으로 이름을 남기려면 이 정도 와드는 너끈히 해치워야 하나 보다.
신체의 일부를 못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면서도 왜 나는 다시 바벨을 드는 걸까. 요즘 한창 수영을 배우고 있는 내 아이가 어느 날 수영장 입구에 들어서기 직전에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기 싫은데 기대되네.”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내 손이 저절로 무릎을 탁 쳤다. ‘맞다, 내가 크로스핏을 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바로 저거다!’ 아이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난 바벨을 들어 올릴 때마다 ‘열탕’에 몸을 담그고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온몸에 통증을 짊어진 날에는 정말이지 걷는 것도 버거워서 백 번이고 박스에 가기 싫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뜨거운 크로스핏 도가니 속에 들어가면 비로소 아, 몸이 풀린다, 이제 좀 시원하다,라는 감정이 온몸에 퍼졌다. 얼마 전, 와드에 앞선 준비 운동으로 벽에 마사지 볼을 대고 어깨를 풀 때였다. 옆 벽에 기댄 오전 멤버 한 분과 무슨 운동을 할 때가 제일 싫은지 얘기했다. 크로스핏으로 단련된 탄탄한 근육을 소유한 남자 회원의 입에서 "저는 쓰러스터(Thruster)요. 완전 ‘씨러’ 스터예요"라는 말이 나왔다. 남들 보기에 고수인 그가 와드에 적힌 쓰러스터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그분이나 나나 늘 박스에 모습을 드러내는 고정 멤버다. 주 6일 나오시나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주거니 받거니 웃으며 대화가 오갔다. 와드명은 ‘에어포스(Air Force)'였다. 제목에서부터 몰아붙이는 힘이 느껴져서 숨이 가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