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화요일. 오랜만에 팀 와드를 했다. 두 명이 한 팀이 되어 진행하는 와드다. 팀 명을 생각해 보라는 코치님 말에 ‘이름만이라도 Rx라고 해볼까?' 하는 객기가 발동했다.
“저희 팀명은 Rx로 해주세요.”
우리 박스에서는 'Rx'D'를 간단하게 'Rx'라고 부른다. Rx'D는 '처방전'이라는 뜻이다. 본래 해당 와드가 짜인 의미에 합당한 무게나 횟수를 처방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와드를 Rx'D로 한다는 것은 정해진 와드 그대로를 수행한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보통 Rx'D는 최고난도 레벨과도 같은 의미로 통용된다. 반면에 아직 초보자인 나는 ‘Scale(스케일)’을 낮춘 와드를 한다. 스케일이란 개인의 운동 능력에 맞춰 무게나 횟수, 동작을 조절해서 와드를 진행하는 것이다. 대개 A, B, C, D와 같이 여러 레벨을 제시해 준다. 위의 의미를 토대로 살펴보면, 각 회원이 화이트보드에 적힌 Rx'D, A, B, C, D 레벨 중 자신이 할 수 있는 난이도를 선택해서 와드를 하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 가장 낮은 D레벨이나 그보다 한 단계 위인 C레벨을 선택한다. 나보다 더 초보자도 분명히 있다. 크로스핏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여성이라면 대개 나보다 적은 무게를 드는데, 그분은 코치님이 따로 E 혹은 다른 알파벳으로 레벨을 표시한다. 나와 한 팀이 된 회원도 나랑 비슷한 운동 레벨에 있는 분이었다. 우리 팀 이름을 본 몇몇 회원이 불타는 의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이름이 너무 과했나 싶어서 멋쩍었다. 실제로 Rx’D를 할 것 같아 보이는 남자 회원이 순발력 넘치는 센스를 동원해서 “저희는 ‘살살’로 할게요”라고 했다. 귀여운 팀명에 회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다 정해진 후에 와드가 시작됐고, 우리 Rx팀의 기록은 역시나 D에서 E쯤 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와드를 하는 20분 동안 내 머릿속이 완벽한 Rx‘D였다. 운동의 몰입도로 보자면 말이다. 가쁜 숨이 정점에 치닫았지만 그것을 넘어서 한번 더 스내치를 해낸 순간에, 육체가 없는 것 같은 홀가분한 지점에, 생각과 이성마저 사라진 상태에, 먼지 한 톨만 한 잡념도 떠다니지 않는 공백 상태에 희열을 느꼈다. 격렬함의 정점은 의외로 고요한 법이다. 모든 것이 다 비워지고 운동이라는 본질 자체에만 몰입한 순간은 마치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낸 Rx'D 레벨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SNS에서 자주 언급되는 김연아 전 선수의 연습 영상이 있다. 연습하고 있는 김연아에게 인터뷰어가 물었다.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해요?” 김연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뭘, 뭘 생각해요?”라며 운동할 때 왜 생각이란 걸 하냐는 듯 반문했다. 경기가 아닌 연습 중이었지만 나는 이것이 몰입을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몰입의 정점을 얘기하자면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달리던 순간을 빼놓을 수 없다. 중력을 거슬러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840m 떨어진 다음 정거장까지 전력 질주해서 기어이 버스를 잡아 타고야 말았다. 배차 간격이 길어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버스이기도 했지만, 굳이 쫓아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냥 뛰는 게 좋아서였다. 달리기를 할 때 내 몸은 땅에 곤두박질치기 직전 날개 쳐 오르는 새끼 독수리가 느꼈을 스릴감을, 거칠 것 없이 날아갈 것 같은 자유함을, 버스를 잡아 탔을 때의 쾌감을, 유유히 모든 신체 부위를 컨트롤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달리는 순간에는 몸도 없고 생각도 없었다. 날듯이 뛰는 내 육체가 공기 중에 완전히 흡수됐다. 어린 시절 달리던 때처럼, 마흔이 넘은 육체로 운동하는 순간에도 몰입의 정점을 찍고 싶다.
‘운동한다’라는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운동복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20대 때의 나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옷을 입으면 견디지 못했다. 길거리에 다니는 그 어느 누구와도 스타일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어제 입었던 스타일과 오늘 입는 스타일이 동일하면 참지 못했다. 그래서 제복을 입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눈앞에 있는 사람과 거의 비슷한 룩을 착용하고 있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것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는다. 비본질에 연연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 운동할 때 내 복장은 언제나 동일하다. 일종의 교복룩인데, 블랙 계열 상의 3벌, 블랙 계열 하의 2벌을 번갈아 세탁해서 입는다. 스티브 잡스의 블랙 터틀넥처럼, 마크 저커버그의 그레이 티셔츠처럼,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의 것을 착용...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괜찮다. 잔가지를 치고, 운동에 쓸 에너지가 운동에만 가길 원한다. 여러 군데에 에너지를 잘 분배할 수 있는 프로가 못된다.
‘들다’라는 행위에 몰입하다 보면 일종의 명상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내 손에 쥔 쇳덩이는 나를 짓누르려 하지만 나는 기어코 밀어 올려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그 상태에 집중하게 된다. 내 아이가 다닌 유치원에서는 정기적으로 명상 시간이 주어졌었다. 거기에 익숙해진 아이가 불쑥불쑥 개인 명상 시간을 가질 때가 있다. 줄넘기를 할 때는 반으로 접은 줄을 가지런히 땅바닥에 내려놓고 운동 시작 전 명상을 했다. 검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간 쉬는 시간에 죽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명상을 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대뜸 명상을 한다고 혼자 구석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본인은 진지하겠지만, 나는 혼자서 풉, 풉, 입 밖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런데 어쩌면 아이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운동이 마치 명상과 같다는 것을, 몰입의 정점이 마치 공백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